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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오 영감 「행복은 여자들의 시」

by 은지용 2023. 3. 4.

고전 속 여자, 남자, 또는 사람



머리카락이 그 새 많이 자랐다. 겨울을 지내고 봄을 맞는 머리카락은 내 피부만큼이나 푸석푸석하다. 겨울바람이고 봄바람이고 내 몸에서 수분을 가져가는 데에는 전혀 봐주지 않는다. 모근마다 넘쳐나던 힘도 나이가 들면서 자꾸 빠진다. 길어진 머리카락들이 무게를 못 이기고 더 납작하게 엎드리면, 내 얼굴의 생기는 완전히 빠져나간 듯 보인다.

미용실에 갔다. 머리카락에 고집 한 방울 약이라도 쳐주면서 가꿔주려고. 옛날에는 할머니들이 왜 뽀글뽀글 파마를 하는지 이해가 안 됐는데. 마흔이 넘고 보니 그 마음이 너무 잘 이해가 간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들은 힘이 있다. 나이 들었다고 맥없이 쳐져있지 않고, 얇아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는 맨 두피를 가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어릴 땐 그렇게나 쭉쭉 뻗기만 한 머리가 갖고 싶더니, 나이가 들면서 굽이진 머리가 절실하다.

동네에 새로 생긴, 후기가 좋은, 쾌적한 미용실이었다. 내 머리카락을 담당한 미용사는 20대로 보이는 남자였다. 군대를 갔다 왔을까. 곱다. 머리카락에 살짝 웨이브가 있고 손길도 섬세하다. 말투도 조심스럽다. 주변을 둘러보니 남자 손님이 꽤 많다. 중년 이상의 남자들도 보인다. 시대가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이런 미용실에서 몸치장에 관심있는 남자를 이렇게나 많이 볼 수 있다니.


우리 아빠는 아직도 이발소를 굳이 찾아가 머리를 깎는데. 이런 미용실 어색해하는데. 여기엔 참 많기도 하네. 이들은 머리를 깎기만하지 않는다. 살짝 펌도 하고 염색도 한다. 하긴 요샌 식당에 남자들끼리 와서도 맛있는 거 사 먹고 사진 찍는 모습을 본다. 내가 20대 때에는 그게 엄청 어색한 일이었는데. 세상 참 많이 바뀌었다. 내 아들이 이발소보다 미용실을 선호하고, 식당에 친구들과 가서 사진 찍는 모습도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세상이 엄청나게 바뀌고 있는 것 같긴한데.
한편으론 원래 그랬던 것도 같다.
동물의 세계에선 본래
암컷보다 수컷의 화려함이 일반적이지 않던가.

몸치장이 여자들의 장신구라면
행복은 여자들의 시다.
그녀는 행복했다면 매혹적이었을 것이다.



발자크의 1835년작 <고리오 영감>에서 전지적 시점의 작가가 타유페르에 대해 묘사한 말이다. 그렇다. 행복하면 얼굴에서 빛이 난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서로에게 빛이 된다. 근데 어딘가 묘하다. 맞는 말이긴 한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여자한테 한정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남자로, 사람으로 변환해도 자연스럽다.

고전 문학에서는 종종 여자, 또는 남자란 단어를 사람으로 바꿔 읽는 것이 더 의미전달이 잘 될 때가 있다. 하인, 흑인, 인디언, 원시인, 야만인 등의 단어들도 마찬가지다.

인간을 열심히 탐구한 과거의 작가들도 일상 깊이 각인된 여러 인간상의 위계질서와 시대상은 완전히 털어내기 어려웠던 것 같다. 비난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들도 한 시대를 살았던 한 사람의 인간이니까.

또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이야기나 문장마다의 뉘앙스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 문학 속에서 그것은 향신료와 같아서 이야기의 맛을 더 살리기도 한다.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이나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 딸들이 아닌 아들들에게 이용당하고 배신당하는 이야기였다면, 그들의 불행이 이 정도로 처참하게 보이진 않았을 것 같다.

딸을 아들로 바꿨다면, 적어도 그 아버지들의 이름은 후손을 통해 남지 않았겠는가. 아들이 아버지의 희생을 딛고 일어서는 이야기는 그냥 있을만도 하다. 여자였기에, 딸이었기에 고리오 영감이나 리어왕의 최후가 더 비참해 보인다. 완전히 짜내어져 길모퉁이에 내버려진 레몬껍질 신세가 됐다. 그래서 이야기는 더 특별해졌다.


여자들의 타락상이 어느 정도인지
그 깊이를 알게 될 테고,
남자들의 비참한 허영심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헤아리게 될 거예요.




발자크가 보세앙 자작 부인의 입을 빌려 당시의 시대상을 꼬집은 부분이다. 역시 감칠맛 나는 문장이다. 동시에. 여기에서 사람들이 여자에 대해 얼마나 정절과 청결을 내심 기대하는지 볼 수 있다. 그때부터 이어져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는 인간상이다. 남자한테 걸레란 욕은 쓰지 않으니까.

또 허영심이라는 것이 가정 안에서나 혼자 있을 때보다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빠지기 쉬운 늪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허영이나 체면 같은 단어가 (혹은 '가오'나 '폼재기'같은 단어가) 사회생활의 주체가 되어온 '남자' 사람과 더 잘 결부되는 고리도 보인다. 지금도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는 물건과 행동들에 더 민감한 남자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나와 너를 포함해서, 인간은 실수하기 마련이니까. 완벽이란 강박은 생명에게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니까.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는 의식 없이 취하면 위험한. 마약 같은 향신료가 있기 마련이다. 오랜 세월 살아남은 이야기 속에도 존재한다.


오래도록 살아남은 과거의 이야기를
지금 읽으면서 꼭 한 번은
꺼내놓고 싶었던 부분이다.


고전 문학 광산 속 굽이진 길에서
질식하지 않고 다이아몬드를 찾으려면
눈을 더 크게 떠야 한다.
이마에 주름이 지도록.


뭐. 주름은 어쩔 수 없다 치자. 아직 마비의 기능이 있는 보톡스는 아직 맞고 싶지 않다. 보톡스로 젊음을 얻기보다는 깨어있고 싶다. 근육 하나하나까지. 그런데 머리만큼은 아직 젊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미용실에 간다. 머리카락 하나하나 납작 엎드리지 않고 올올이 자기 의견 가졌으면 한다. 머리에 붙어있는 너희들만큼은 시간에 엎드리지 않는다면. 오래도록 살맛 날 것 같다.


사진 Unsplash - Adrian Fern&amp;amp;aacute;nd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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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 속 남자, 여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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