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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일기/이곳에서12

40과 50번째 사이 생일 아침에 40과 50번째 사이 생일 아침이다. 생일 선물로 가족들을 다른 곳으로 내보내고 혼자 집을 차지했다. 혼자 조용한 자유를 누리고 싶었던 건데. 어쩌다 보니 청소하고 이제 물 끓이고 앉았다. 밥을 스스로 해 먹고 머무는 곳을 스스로 청소한다는 것은 가끔 어떤 의식 같다. 나 자신에 대한 예의랄까. 아주 대단하진 않아도 기본적인 것.  청소하고 빨래 돌리는 와중에 영화 LEO가 자꾸 생각났다. You are not that great이란 평화로운 노래 장면이 특히. 나이 지긋한 LEO라는 도마뱀이 부잣집 여자아이에게 너네 집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 힘 빼, 나긋나긋하게 불러주는 그런 노래. 또 다른 생각도 이어졌다: 자녀가 나보다 더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만 내려놓으면 된다. 그러면 관계가 좋아진단 얘기도 .. 2025. 1. 11.
눈 내리는 39번 국도에서 눈이 내렸다. 출근길부터 심상치 않았다. 움직이는 차 안에서 바라보는 함박눈은 하늘에서 내리꽂는 수많은 창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연걸 나오는 옛날 영화 의 마지막 장면처럼. 회사가 경기도 외곽에 있다. 눈이 내리면 오르막 내리막이 구간이 있고 봉고와 트럭들이 많이 다니는 39번 국도가 아수라장이 된다. 다행히 오늘 출근길은 괜찮았다. 오히려 고속화 도로들의 제설상태가 더 허술했다. 회사에 도착했다. 눈이 그칠 줄을 모른다. 크고 작은 공장들이 모여있는 곳인데, 이 회사 저 회사 각자 마당의 눈을 치우느라 바닥을 긁은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다 치우고 20분도 지나지 않아 눈이 다시 리필된다. 치운 흔적을 지운다. 사람이 치우고, 눈이 지우고, 치우고, 지우고. 최근 책 모임을 했던 터라 눈이 예사롭게.. 2024. 11. 27.
우정총국에 가 보았다 우정총국에 왔다.조계사 바로 옆, 인근에 ‘도화서 터’라는 안내판이 있는 곳이다. 단층짜리 작은 기와 건물이다. 조계사와 인사동 길을 그렇게 지나갔건만 우정총국은 낯설었다. 당연히 조계사 부속건물이려이 하고 지나쳤었다. 알고보니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이라고 한다.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장난감 자동차들로 집배원 차량 변천사도 보여주고. 최초의 우표와 우정총국 설립의의가 기록된 승정원 일기 판본도 전시되어 있다:  우리나라가 각국과 통상을 한 이래 내외의 관계와 교섭이 날로 증가하고 관청과 상인들이 주고받는 통신이 번성해지고 있다. 그러나 우편의 시설이 없으면 원근을 막론하고 소식을 연럭할 길이 없을 것이다. 이에 명하노니, 우정총국을 설립하여 연해 각 항구를 내왕하는 우편물을 취급할 뿐만 아니라 .. 2024. 11. 9.
잠언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 이 둘을 구별하는 지혜 2024. 11. 6.
날씨 이야기 날이 갑자기 쌀쌀해졌다. 엊그제만 해도 너무 덥다고, 사무실에서 낮에 에어컨을 켰는데. 오늘은 책상 아래 온열기구를 켰다. 컨테이너 사무실이라 바깥의 온도변화에 더 개방적이다. 다리가 추웠다. 협착증이 있는 사장님은 발이 시리다고 하셨다. 비염인 친구들은 오늘을 기점으로 일제히 콧물이 난다고 톡방에서 한 마디씩 했다. 이렇게 극적일 수가. 의 뫼르소가 태양 때문에 방아쇠를 당기게 되는 게 이해가 될 정도의 더위에서 곧바로 추위로 넘어가나 보다. 벌써 걱정이다. 날씨 얘기로 대화를 트는 것이 너무 가식적으로 느껴졌었다. 그냥 본론으로 들어가지, 웬 꾸밈이 이렇게 많아 싶었더랬다. 곁다리 말고 중요한 이야기로 바로 연결되고 싶었더랬다. 그래서 하려는 말이 뭔데? 이제 보니. 세상에 날씨만큼이나 중요하고 근본.. 2024. 10. 2.
일상적인 기적 며칠 전 도널드 트럼프가 총알을 피했다. 미국 대선 공화당 후보로 지지자들에게 연설하던 자리였다. 그를 저격하려던 이가 있었고, 트럼프가 우연히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총알은 빗나갔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트럼프는 신의 보살핌을 받는 메시아로 떠올랐다. 그 자리에 있던 지지자 한 명이 사망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며칠 전 서울시청 앞 횡단보도에 차량이 덮쳤다. 평일 밤이었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을까. 갑자기 돌진한 차량에 속수무책으로 치인 사람들이 사망했다. 어떤 이는 간발의 차로 그 차를 지나쳤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운전자도 고의로 한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생존자에게도 위로를 건네야 할 것 같다. 나도 분명 언젠가 죽는다. 안다. 그게 오늘 일수도 있다. 4.. 2024. 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