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렸다. 출근길부터 심상치 않았다. 움직이는 차 안에서 바라보는 함박눈은 하늘에서 내리꽂는 수많은 창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연걸 나오는 옛날 영화 <영웅>의 마지막 장면처럼.
회사가 경기도 외곽에 있다. 눈이 내리면 오르막 내리막이 구간이 있고 봉고와 트럭들이 많이 다니는 39번 국도가 아수라장이 된다. 다행히 오늘 출근길은 괜찮았다. 오히려 고속화 도로들의 제설상태가 더 허술했다. 회사에 도착했다. 눈이 그칠 줄을 모른다. 크고 작은 공장들이 모여있는 곳인데, 이 회사 저 회사 각자 마당의 눈을 치우느라 바닥을 긁은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다 치우고 20분도 지나지 않아 눈이 다시 리필된다. 치운 흔적을 지운다. 사람이 치우고, 눈이 지우고, 치우고, 지우고. 최근 <작별하지 않는다> 책 모임을 했던 터라 눈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해가 떠 있는 동안 집에 갈 생각이었다. 지난해 눈길에서 차가 빙글빙글 돌고 오르막길을 가지 못하던 경험을 했던 터. 다가오는 말일 결제를 위한 이런 저런 일들을 최소한으로만 하고, 오후 3시쯤 일어났다. 회사를 나오자마자 근처 지방도로에서 차가 미끌거렸다. 식은땀이 흘렀다. 가끔 마끄러지며 어찌저찌 아까의 그 제설상태 좋은 39번 도로로 들어가자 안심이 됐다. 해도 잠시 나는 듯했고, 멀리 파란 하늘도 살짝 보였다. 철새도 날아가고, 운치 있네 싶었다. 1시간을 왔는데 아직도 회사 반경 10Km 이내. 집 가는 길이 참 멀구나.
눈이 다시 내린다. 앞에 가는 트럭이 비틀비틀한다. 내 차도 비틀비틀한다. 1단 기어로만 가는데 핸들이 휙휙 돌아가는 구간이 있다. 옆에는 거대한 트럭이다. 다시 식은땀이 흐른다. 저 트럭은 미끄러지지 않으면 좋겠다. 운전을 포기할까? 뒤로 돌아갈까? 멈춰서서 레커차를 부를까? 말일 결제의 압박은 눈길 트럭 사이에서 짜부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만약 이 눈길에서 저 세상 가게 될 경우를 생각해 보니, 어처구니없게도 쓰다 말고 저장해두거나 생각만 하고 사라진 글들이 아른거렸다. 네**에 쓰는 요리 얘기 말고. 인 얘기랑 회사 이야기. 아, 회사 이야기를 써야겠다. 미련, 아쉬움이 거기에 남더라. 마음에 들건 아니건 공개든 비공개든, 하고 싶은 말은 글로 꺼내두자. 바로바로. 일단 오늘 집에 가면 이 이야기를 써야겠다. 그래. 일단은 킵고잉. 천천히 조심조심.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4시간을 왔는데 아직도 경기도 화성시. 국도라 휴게소가 귀하다. 그렇다고 다른 도로로 빠지기엔 눈길이 너무 위험하다. 어차피 막히는 도로인데, 차를 세우고 길에서 볼일을 해결할까? 프라이버시가 처참한 도로에서? 그건 아니지. 김장 하는 날에는 하루종일 화장실에 안 가고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할 수 있을 거야, 마음을 다잡았다. 앞으로도 1시간은 더 갈 것 같은데. 그렇다고 다른 방법 있음? 없음. 그럼 진격. 터질것 같지만 아랫배 힘주고 주유소가 있는데까지 조금만 더 가보자. 천천히. 조심조심. 할 수 있다.
저녁 8시가 넘어갔다. 길이 얼어붙기 시작하는 것 같다. 39번 도로 언덕 정점에 차들 여러대가 멈춰서있다. 대충 4~5대가 길 이쪽 저쪽에 멈춰 서있다. 미끄러져서 부딪힌건가? 살펴볼 겨를이 없다. 눈길에서는 멈추면 안 된다. 계속 꾸준히 가야한다. 멈추면 핸들이, 바퀴가 제멋대로 돌기 시작할테니까.
길 주변에 멈춰선 차들을 지나고 나니, 텅 빈 도로다. 1단, 2단, 3단까지 넣고 비상등을 깜빡이며. 깜깜하고 얼어붙기 시작한 도로를 지났다. 할 수 있다. 천천히. 조심조심. 너무 서두르지 않고, 멈추지도 않도록. 그러니까 꾸준히 차근차근. 나도 모르게 중얼중얼.
그렇게 39번 도로를 벗어났고.
수인산업도로에 접어들어 주유소에 안착했다. 자동차는 밥을 먹고, 나는 배출을 했다. 살 것 같았다. 그 곳부터 집까지는 제설작업이 잘 된 고속화도로였다. 집 바로 앞에 차 한대가 내리막길에서 벽쪽으로 멈춰있다. 시에서 나온 이들인가 열심히 수신호 중이다. 고생이 많습니다. 8시 30분. 집이 보인다 눈 쌓인 나무와 가로등, 집집마다 켜진 불들이, 이제야 아름답다. 돌아왔다. 하나의 성공. 좀 더 운전에, 힘든 상황에, 자신감을 가져도 될듯..,
내일은 더 험난한 길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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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39번 국도에서
귀가를 포기하고 싶었다 | 눈이 내렸다. 출근길부터 심상치 않았다. 움직이는 차 안에서 바라보는 함박눈은 하늘에서 내리꽂는 수많은 창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연걸 나오는 옛날 영화 <영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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