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수요일.
내일은 목요일.
수요일은 아이들 모두 여유있는 날입니다. 학원이 없거든요. 그래서 가끔 외식도 후딱 하고 들어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여유로운 수요일마다 분노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지금 시각이 수요일 밤 10시. 오늘도 그래서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첫째는 여유를 마음껏 즐기다가 결국 과제를 못하고 내일 학원에 숙제를 못하고 갈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지난주에도 그랬어요. 학원에 전기세 내주러 가는 일인입니다. 학원 선생님은 참 좋아하는데, 왜 이렇게 숙제를 안해가나 싶어요. 네가 좋아하는 선생님도 아이들이 숙제를 해와야 분위기 좋은 학원으로 소문나서 좋아할거라고 해보지만. 마음에 가 닿는것은 단 몇 초. 다시 마음은 핸드폰 속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둘째는 낮에 실컷 놀고 밤이 깊어지면 울면서 과제를 합니다. 첫째처럼 '그럴 수도 있지 뭐' 하며 습관적으로 과제를 안해가는 것 보단 대견한데. 그런데 습관적으로 늦게 울면서 하니까 이것도 참 열받아요. 연예인 포토카드 좀 덜 보고 7시 수학 루틴을 지키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봅니다.
오늘은 남편도 한 몫 합니다. 개인적 성취를 위해 블로그를 쓰기로 했거든요. 노후는 막막하고 자전거와 수리 삽질은 좋아하니까 관련 기록을 짧게라도 남겨보라고 했습니다. 어느날은 에어프라이어를 분해했다 조립하고, 어떤 날은 자전거 손잡이를 교환하고, 어떤 날엔 자전거 타이어를 바꾸고, 최근에는 오래된 콘솔 게임기 세팅에 매일 저녁을 쏟아 붇더군요. 그래 당신은 그렇게 뜯어보고 수리(?)하는걸 좋아하니까 관련 기록을 남기면서 길을 모색해봐 했습니다. 본인은 재미있을테니까요. 그런데 딱 오늘로 작심삼일입니다. 오늘 안 쓴대요.
아니. 공부 잘 하고 싶고, 인생의 옵션을 넓히고 싶은데, 매일의 할 일을 안하면 되나요?! 그러기 있기? 없기?
도대체 내가 '넛지'하고 '하드캐리'해야 하는 인생이 몇 개인가 싶으면서 '딥빡'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오늘 사실 저도 좀 피곤합니다.
관세 대응 관련 설명회에 다녀왔거든요. 저희 회사 매출은 수출이 대부분인데, 요즘 무역 환경이 급변하고 있어서 어떻게 대응해야하나 고민이 많습니다. 그 설명회가 도움이 될까 싶어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다녀왔지요. 강남역으로 이동해서 빨간색 광역 버스를 두 차례 탔는데, 어후. 지하철이나 자차 이동과는 다른 피로가 마구 몰려오더라고요. 저도 경기도민입니다만 자차로 경기도내 이동이라 느낌이 달라요. 아침 저녁으로 빨간 버스를 타고 도심 이동하는 프로 경기러들이 새삼 존경스러웠습니다. 쨌든, 회사도 걱정되는데, 온 가족 인생 걱정도 내가 다 해야하나 싶으면서. 도대체 몇명을 하드캐리해야 하는거얏 하며. 마음의 불길은 정점을 찍었습니다.
어두운 베란다, 일인용 소파에 앉아, 자판을 두들기고 나니 좀 낫습니다.
불이 좀 식었습니다. 이렇게 꺼내놓고 보니.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네요.
다 스스로 해야 하는 일. 누가 옆에서 훈수 놓는다고 별로 달라지지 않을, 각자의 판입니다. 훈수가 훈수인지 알 수 없기도 하고요. 아이들 수학 과제 제가 대신 할 것도 아니고, 남편의 인생 2막을 위한 블로그도 본인이 싫으면 그만이죠. 강요로 될 일도 아니고요. 에효.
생각해보면 저도 쓸모없는 일 하는 시간 참 많이 흘려보냈거든요. 무협지에 빠져거 주구장창 보기도 했고, 지뢰찾기 게임에 왕창 빠져서 몇날며칠 하기도 했고, 연예프로그램을 몇 시간씩 보면서는 이렇게 낄낄대는 스스로를 한심하게 보기도 했었더랬죠. 사실 초중고교 때에는 학원도 엄청 많이 빼먹었습니다. 학원 원장님이 너희 부모님한테 돈 받기 미안하다며 돌려준 적도 있었어요. 그런 시간이 쌓였기에. 나이 마흔 넘어서 참여하는 과제는 빼먹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릅니다. 꾸준히 뭐라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지도 몰라요.
오늘 아침 스쳐가는 TV에서 본 <친절한 금자씨>의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화면 가득 배우의 얼굴이 채워지고, 등장인물이 입을 열었어요. 이제보니 오늘 하루의 핵심 같은 말이었어요. "너나 잘 하세요."
나나 잘해야겠습니다.
https://brunch.co.kr/@7bef61f7eaa2497/132
너나 잘하세요
아들딸 하드캐리 실랑이 인생 소모전 한탄 | 오늘은 수요일. 수요일은 아이들 모두 여유 있는 날입니다. 학원이 없거든요. 그래서 가끔 외식도 후딱 하고 들어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여유
brunch.co.kr
'거기일기 > 이곳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40과 50번째 사이 생일 아침에 (0) | 2025.01.11 |
---|---|
눈 내리는 39번 국도에서 (0) | 2024.11.27 |
우정총국에 가 보았다 (2) | 2024.11.09 |
잠언 (0) | 2024.11.06 |
날씨 이야기 (0) | 2024.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