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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작가/시작하기

이방인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by 은지용 2023. 4. 9.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알베르 까뮈의 소설 <이방인>에서는 세상 편견 없고 담백한 뫼르소가 이야기를 한다. 저 첫 문장. 양로원에서 살던 엄마의 부고를 전하는 그의 독백은 몇 번을 봐도 군더더기 없이 강렬하다. 장례식을 위해 이틀간의 휴가를 신청하는 자리에서 사장에게 하는 '그건 제 탓이 아닙니다'라는 말까지 어이가 없다.

누군가 이 책을 소개할 때 '사춘기 아이들에게 뿅망치 같은 책'이라고 했다. 동의한다. 내가 처음 이 책을 만난 것도 고등학교 교실 뒤편 학급문고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뭔가 이 세상이 이상하다고 심각하게 느낄 때, '어 맞아' 하이파이브 해 주는 책 같았달까. 뭔가 충격적으로 위로가 되었던 느낌만 남았었다.
 
미풍양속에 대해 얘기한다면, <이방인>은 결코 모범사례로 활용되지 않을 것이다.

관례상 매우 적절치 못한 상황과 태도가 지천이기 때문이다. 죽은 엄마의 관을 앞에 두고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홀짝거린다거나. 장례식을 치른 주일에 바다에 놀러가 여자친구를 사귄다거나. ‘창고관리인’이라 주장하지만 사실상 '포주'인 레몽과 친구가 되어, 그의 전 여자친구를 응징하기 위한 작당모의에 동참한다거나. 도무지 상식적인 게 없다.

그 미스매치된 순간들은 그러나 너무나 감각적으로 와닿는다.

 
바닷속에서 유영하는 마리와의 장면은 뜨겁고 시원하고 나른하며 자유롭다. 온몸에 닿는 바닷물의 감촉에 무더운 태양이 축복처럼 느껴진다.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 레몽과 말을 섞고, '밥 해 먹기 귀찮아서' 그가 주는 와인과 순대를 먹으며 친구가 될 땐 그 소소한 이유들이 어쩜 이리 공감 되는지. 태양의 심벌즈가 울리고 세계가 기우뚱하는 태양살인 장면에는 빛과 심벌즈가 나를 제압한다. 고음, 중음, 저음의 소음이 웅웅대는 면회실 장면에는 이명이 울린다. 모두가 나를 연기하는 재판 장면은 섬뜩하면서도 웃긴다.

책 속 인물이나 상황마다 부조리의 화음이 감각적으로 가득 차 있다. 시각, 청각, 촉각, 유머 감각을 건드린다. 그래서일까. 읽다 보면 어느새 뫼르소의 감각에 공감하고 있다. 부조리의 화음에 내 마음이 열렸다. 이게 마음속 공허란 구멍을 키울 것이라 예감하지만. 뫼르소야 말로 오히려 편견 없이 사람들을, 세상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본다. 그가 말하는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이나 '여름 하늘에 놓인 우연의 길목'에 자포자기, 아니 오히려 설레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상해봤다.
이 감각적인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영화에서 가장 공들이고 싶은 장면은 마랭고의 장례식행렬이다.
 
알제 교외의 어느 시골, 붉은 흙과 초록이 어우러진 구릉지대를 상상해 본다. 하지가 막 지난 초여름. 붉은 해가 떠오르는 아침, 그림처럼 선명한 집이 띄엄띄엄 보이고. 흙냄새가 훅 끼쳐오고, 바다의 소금기 섞인 바람이 살짝 불었다.
 
뫼르소는 밤샘을 한 직후였다. 엄마의 관을 둔 방에서 양로원 사람들과 함께, 불을 환하게 켜둔 채, 관습대로, 불편하게 앉아, 아무 말 없이, 졸면서 밤샘을 했다. 피로했지만 따뜻한 밀크 커피가 몸을 풀어줬고. 오늘 아침은 회사의 서류더미 속으로 출근하지 않는다. 평소와 다른 일상이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왔다. 엄마가 없는 일상은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다. 오랜만의 교외 흙냄새에 산책하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죽음을 애도하는 관습적 절차 한가운데에서 그는 상실감보다 삶을 느꼈다.
 
그래서 이 장면의 별명은 아이러니다. 죽음을 애도하는 관습에 단조음악이 깔리지만 주류Major이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하니까. 동시에 산책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흙냄새에 장조음악을 넣어주고 비주류 Minor라 이름 붙인다. 관념상 장례식에서 그러면 안 되니까. 단조(Minor)와 장조(Major), 주류(Major)와 비주류(Minor). 아이러니의 화음.

 
부조리의 화음은 어디에서나 울린다.
 
뫼르소란 이름에는 어찌해 볼 수 없는 강력한 영향력의 '태양'과 자유롭게 유영하며 더위를 식혀주는 '바다'가 결합되어 있다. 장례식이라는 절차에도 뭔가 어긋난 것이있다. 엄마는 종교가 없었는데 종교적 절차에 따른 장례식을 원했다. 부모의 죽음을 '신 아버지'라 불리는 신부님에게 위임해야 한다. 뫼르소는 이제 부모가 없는데, 신부님에게 몽 피스 Mon fils, '나의 아들'로 불린다. 어찌 보면 별 것 아닌데, 따지고 들면 이상한 것투성이다.
 
양로원에서 성당까지는 걸어서 45분.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장례식 행렬이 이 교외 시골을 걸어가는 롱테이크 장면이다.
 
 
알제리의 시골
녹차가루 흩뿌려진 것 같은 실편백나무들
피처럼 붉은 흙 테라로사가 드문드문 보이는 언덕
구불구불한 먹색의 빛나는 아스팔트 길
멀리 바다가 아련히 빛나고 있고
하늘은 태양이 장악했다
 
그곳에 검은 옷을 입은 장례행렬이 걸어간다.
그리고 등장인물 하나 더.
페레스 씨.

엄마는 삶의 마지막을 느끼는 그곳에 약혼자를 두었다. 약혼자 페레스 씨와 엄마는 매일 저녁 간호사를 대동하고 양로원에서 마을까지 산책했다고 한다. 해가 진 후, 휴식 같은 시간에 걸었다. 그녀의 죽음을 기리는 오늘 장례 행렬은 그 길을 땡볕에, 검은 상복을 입고 통과한다. 
 

나는 주위의 벌판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하늘 닿는 언덕까지 줄지어 늘어선 실편백나무들, 그 적갈색과 초록색의 대지, 드문드문 흩어져 있지만 그린 듯 뚜렷한 집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고장에서 저녁은 우수에 젖은 휴식과도 같았을 것이다. 오늘은, 풍경을 전율케 하면서 천지에 넘쳐 나는 태양 때문에 이 고장은 비인간적이고 기를 꺾어 놓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알베르 까뮈 <이방인> 민음사 p.27

 

태양과 더위에 기가 질려 가는 시간.
 
노쇠한 페레스 씨가 행렬에서 뒤처졌다.
그러다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잠시 후
그는 시야에 다시 나타났다.
 
장례행렬이 구불구불하고 뜨거운 아스팔트 길을 따라갈 때, 그는 벌판의 지름길로 질러온 것이다. 엄마와의 저녁 산책 때도 저 길을 걷지 않았을까. 그 같은 엇갈림 혹은 만남의 교차는 몇 차례 더 일어났다. 페레스 씨가 작은 점으로 적갈색과 초록색의 벌판을 질러가는 이 모습이 책을 덮고도 자꾸만 떠올랐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는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구름처럼 드리워진 열기 속에 파묻힌 페레스 영감이 까마득하게 멀리 보이더니 이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눈으로 찾아보았더니 그가 길을 벗어나 들판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나는, 길이 내 앞 저쪽에서 구부러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지방을 잘 알고 있는 페레스가 우리를 따라잡으려고 지름길로 접어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길이 구부러지는 곳에서 그는 우리와 다시 만났다. 그랬다가 또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벌판을 가로질러 갔고, 그러기를 여러 번 되풀이했다. 나는 관자놀이에서 피가 뛰는 것을 느꼈다.

p.29

 
 
책을 통틀어 나를 후벼 파던
그 말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을 보여주는데
저만한 장면이 있을까.
 
넓은 들판에 작은 점이 되었던 페레즈 씨가 검은 옷을 차려입은 행렬을 만난다. 혹은 엇갈린다. 일행이 되었다, 이방인이 되었다, 반복한다. 장례식 행렬이 메이저라면 페레스 씨는 마이너다. 길을 오히려 더 잘 활용하는 그는 마이너 같은 메이저다. 마이너건 메이저건. 그도 행렬도 성당에 도착한다. 도착 직후 페레스 씨 얼굴은 흥분과 힘겨움으로 눈물범벅이 되어있다. 눈은 주름 속에 파묻혀 있었고, 깊은 주름 때문에 눈물도 땀도 흐르지 않고 관에 칠한 니스칠처럼 번들거리기만 했다. 
 
누구나 스스로 이방인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빠져나갈 길 없는' 태양의 영향력 아래에서, 새로운 장소나 기존의 관습의 영향력 아래에서 우리는 이방인이 되었다가, 현지인이 되었다가 한다. 마이너가 되었다가 메이저가 된다. 오늘 아침 집에서 마이너였다가, 출근길 지하철에선 메이저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엇갈림이 하도 많아서 굳이 주류냐 비주류냐, 메이저냐 마이너냐를 구분할 필요도 없을 지경이다. 나와 너를 구분하는 것은 오로지 우연일 수 있으니까.
 
이 장례식 장면은 뫼르소의 잠으로 마무리된다.

 
많은 장면들이 뫼르소의 잠으로 일단락된다. 일시적 죽음의 상태인 잠을 통해 그는 매번 새로워졌다. 리셋. 메이저와 마이너의 원점회귀. 엄마의 장례식 씬은 그가 알제라는 빛의 둥지, 도시로 돌아오고, 집에 와서 잠에 빠져들면서 어두워지고, 화면이 전환된다. 마리와 바다에서 가까워지는 토요일이 시작되고, 일요일로, 월요일로, 일상으로 이어진다.
 
잠은 저녁이란 시간을 내포한다. 빈틈없고 가차 없는 태양이 사라진 시간이자 하루의 절반인 저녁. 이방인을 현지인으로, 현지인을 이방인으로, 마이너를 메이저로, 메이저를 마이너로, 재설정하는, 혹은 바통터치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낮과 밤 사이의 경계에 새벽과 해 질 녘이 있다.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열려있는 시간. 동시에 이쪽도 저쪽도 아닌. 이음새의 시간. 다름이 교차하고 공존하는. 
 
모호한 이방의 시간.

 


 
필요 이상의 말을 절대 하지 않던, 시크가이 뫼르소는 책의 끝 부분에서 폭발한다.
 
드디어. 그는 외침을 마구 쏟아낸다. 그의 외침 반대편에 있는 것은 사형수를 면회 온 사제. 그는 뫼르소의 회개를 유도했다. 사제의 사명이다. 그런 사제에게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핏대를 세우며 고함치는 뫼르소의 모습에 가까이 다가가 본다. 많은 말을 쏟아내고 있지만 아마 감방 안 누구에게도 단 한 마디도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그건 그냥 그의 강력한 독백이다.
 
이 장면에 장조와 단조의, 주류와 비주류의, 현지인과 이방인의, 화음을 넣을까. 아니, 단조의 종교색 짙은 음악이 좋겠다. 그가 죽인 아랍인은 다른 신의 관할이고, 그는 살인보다 엄마의 장례에 슬퍼하지 않은 관습위배로 사형을 선고받은 것과 다름없다. 헨델의 사라방드처럼 숭고하며 암울하고 아름다운 단조음악으로 소리를 높여본다. 역시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자연스럽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외침을 비워낸 그는
한숨 자고 일어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다시금 덤덤해진 독백으로.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 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 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우수가 깃든 휴식 시간 같았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에 그곳에서 엄마는 마침내 해방되어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비워 버리기라도 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이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p.148 (끝)

 
내가 영화인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알베르 까뮈에게 휴식이 있기를.


Unsplash - Mounir Ab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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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구부러지는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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