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불태우는 세상.
소방수대신 방화수가 있는 세상.
방화수의 호스에서 물이 아닌 등유가 나오는 세상.
소비를 위한 소비를 하는 세상.
천천히, 책읽기가 불법인 곳.
누가 책을 보면 신고된다.
몬태그는 방화수다.
사이렌이 울리면
신속히 출동해
책을 태운다.
책이 불타는 온도 약 232C
몬태그는 방화수.
그 날도 몬태그는 출동했다.
평소와 조금은 달랐다.
동네 산책하던 유별난 아이가
요즘 안보여서 신경이 좀 쓰였다.
또 출동한 곳에 아직 그 범죄자가 있었다.
보통 경찰이 범죄자를 데려간 뒤에
방화수들이 나머지를 청소하듯 불태워버렸는데.
그날은 달랐다.
그러나 오늘 밤에는 뭔가 어긋났다. 저 늙은 여자가 신성한 의식을 망치고 있다. 동료들은 쓸데없이 시끄럽게 떠들고 웃고 농담하면서 아래층에서 말없이 원망에 찬 눈길로 쏘아보는 여자의 섬뜩한 시선을 덮어버리려 한다. 저 여자가 텅 빈 다락방을 울부짖게 만들고 마구 흔들어서 먼지를 날리게 만들고 있다. 자기는 무고하다는 원망이 무수한 먼지들을 동료의 콧구멍 속으로 불어넣고 있다. 이건 정당한 방법도 아니고 애초부터 옳은 일도 아니다. 몬태그에게 환멸감이 마구 몰려왔다. 저 여자가 없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p.66 <화씨 451> 황금가지
She made the empty room roar
with accusation and shake down a fine dust of guilt.
It was sucked in their nostrils at they plunged about.
책들이 몬태그의 어깨 위로, 팔 위로, 얼굴 위로 마구 쏟아졌다. 그는 한 권을 집어들어 불빛을 비추어 보며 흔들었다. 책은 그의 손에서 하얀 비둘기처럼 펄럭거렸다. 어두운 방 안에서 춤추는 조명 사이로 책 한 쪽이 눈송이처럼 사뿐히 떨어졌다. 그 위에 그려진 섬세한 글자들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 혼란과 광기의 와중에 몬태그는 얼핏 한 문장을 보았다. 종이는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지만 그 문장은 마치 강철 도장으로 새긴 듯이 그의 뇌리에 또렷하게 박혔다. '오후의 태양 빛 안에서 시간은 깊은 잠 속에 빠져든다.'
p.66 <화씨 451> 황금가지
Books bombarded his shoulders, his arms, his upturned face.
A book lit, almost obediently, like a white pigeon,
in his hand wings fluttering.
In the dim, wavering light,
a page hung open
and it was like a snowy feather,
the words delicately painted thereon.
In all rush and fervor, Montag had only an instant to read a line,
but it blazed in his mind for the next minute
as if stamped there with fiery steel.
"Time has fallen asleep in the afternoon sunsh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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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이 부분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각인되었다. 책은 한 밤중에 출동한 듯하지만 내 상상 속에서 이 장면은 어스름한 저녁이다. 햇빛의 여운이 아직 남아있고, 하늘은 짙은 파랑과 붉은색이 섞여있다. 출동한 몬태그가 집 안에 들어서자 비난하는 듯한 얼굴을 한 야윈 여자가 서 있고. 방화수 일행이 다락에서 책을 찾았다. 다락방에 있던 책들이 우루루 쏟아지고, 그 중 한 권이 펼쳐져 몬태그의 눈에 각인된다. 그 순간만 슬로모션.
어디선가 상상의 햇빛이 들어와 그 부분에 떨어진다.
"오후의 태양 빛 안에서 시간은 깊은 잠 속에 빠져든다."
영화 쇼생크탈출 주인공이 듣던 '저녁 바람은 부드럽게'가 들리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