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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일기

쓰고 달콤한 직업

by 은지용 2023. 4. 18.

 

 

언제나처럼 나에게 리뷰를 쓰게 하는 것은 의외의 울림을 얻은 책이다. 천운영 <쓰고 달콤한 직업>도 그러했다. 고전문학 읽고 쓰는 엄지작가 모임에서 쓰기 주제를 정했다. 고전문학과 음식으로. 그러면서 참고도서로 얻어 걸린 책이다. 솔직히 누군가 이런 책이 있다 했고, 마침 집 앞 도서관에 있길래 빌려갔다. 슬쩍 들춰보기만 했을 뿐 읽을 마음이 없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 중에도 안 읽고 반납하는 책 많다. 이 책도 그런 책이라 여겼건만. 아 이런. 역시나 허를 찔렸다. 이 책은 주파수가 나에게 맞춰져 있다.

 

먹는 것에 진심인 그녀가 '돈키호테의 식탁'이라는 스페인 식당을 열고 주방에서 일하면서 겪고 생각하고 느낀 바가 기록되어 있다. 관광객처럼 체험하거나 기자들처럼 취재한 게 아니고 식당으로 하루 하루를 유지한 기록이다. 식당이 잘 되면 돈 벌어서 좋고, 실패하면 그걸로 소설을 써도 되니 꽃놀이패라던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일반 업주와 감성주파수가 좀 달랐겠지만, 그래도 그녀의 고군분투와 실재가 느껴져서, 좋았다. 

 

에디터 안지선 씨와 함께 한 달에 한 번 인터뷰를 진행했다. 내가 상을 차리고 음식을 먹으며 음식과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곧 100세가 될 현직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와의 만남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그 생생함. 그 사랑스러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할 일이 있다는 것, 그게 바로 살아 있는 거라고, 그녀는 말했다. 작가가 식당이라니, 건달도 이런 건달이 어디 있어. 건달은 건달을 알아본다니까. 그런 말도 했다. 그 말이 참 든든했다.

돈키호테의 식탁이 아니었다면 이 모든 애틋한 경험들은 결코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식당을 하는 동안 소설은 쓰지 못했다. 소설은 내게 틈내서 쓸 수 있는 작업이 결코 아니라는 걸 알았다. 소설을 쓰는 대신 틈틈이 신문 칼럼을 썼다. 경험한 바대로, 날 것 그대로, 기록하듯 글을 썼다. 반성문 같기도 연서 같기도 춘몽 같기도.

스페인에서 요리를 배우고 식당 자리를 알아보고 공사를 진행하고 식당을 열기까지 2년. 식당 일만큼은 절대로 못 한다던 엄마 명자 씨와 함께 2년간 식탁을 차렸고, 식탁을 접은 지 또 2년이 흘렀다. 

<쓰고 달콤한 직업> 서문, 천운영

 

 

남들 고생한 얘기가 좋은걸까. 글쎄.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1차 산업 전문지에서 기자 명함 갖고 돌아다닐 때, 나에게 항상 느껴지던 뭔가 잘못되었다는 기분이 있었다. 나는 농장도 목장도 하지 않는데, 식품회사나 사료회사에서 일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 일들에 대해 왈가왈부 해야하는 것이 이상했다. 그런 느낌을 생각해보면, 뭔가에 대해 쓰면서 그것을 실제로 경험하고 통과하지 않으면서 하는 것은 쓰는 '척'이다. 그런데 이 책은 척이 아니라 진짜다.  

 

책을 중간 쯤 보다가 책 날개에 있는 작가 소개를 다시 봤다. 증명사진 처럼 찍은 본인 얼굴 아래 음식이 함께 있다. 이 책은 '내가 소화한 세상'이란다. 세상에. 음식, 소화의 과정, 내 몸안의 함수, 배설물, 그 과정은 왜 역행되지 않는가, 미생물의 영역, 이런 얘기 꺼낸게 바로 엊그제인데. 오늘. 이렇게 멋진, 내 마음에 딱 와닿는 소개라니. 사장님이, 아니 작가가 다시 보였다.

 

인상적인 챕터를 꼽아보자면...

 

엄마의 정육점 단골 비법 (뱃속에 있을 때부터의 순대사랑, 엄마가 새 동네 이사가면 정육점이랑 친해지는 과정과 그녀가 스페인 가서 하몽집 사장님과 친해지는 과정. 그렇게 그 동네에 물들어가는 과정)

 

일수 명함을 집어들며 (회사에 있다보면 수 많은 광고전화를 받는다. 가게들한테도 그렇더라. 그들은 때로 고압적으로, 회유적으로, 말한다. 정말 그렇게 일하는 사람들 보면, 참 대단하다 싶으면서도, 씁슬하다. 혀를 차며 공감하며 봤다.)

 

사촌이 땅을 사면 (작가가 차를 바꾼 것에 대해 큰 웃음 주는 할아버지가 계신다.)

 

내 꿈의 주인은 (소화와 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이 소화해서 싼 똥을 자랑스러워 한다!! 소설도 소화해서 싼 똥이라며!!! 이 경우 소화의 과정이 역행할 수 있겠다!!!!)

 

돈케호테의 죽음 (소설 쓸 때 첫 문장이 어렵고, 마지막도 어렵다.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쓰고, 또 쓰고 반복하는 과정을, 가게를 그만해야겠다 싶었던 때 어떡하지 하며 시작을 되돌려보는 이야기. 엄지작가의 끝을 생각해봤다. 어떤 모습이든 읽고 쓰기만은 계속되지 않을까.)

 

그 외에 일상 속에서 소설가적 상상력을 어떻게 펼치는지 보여주는 챕터들도 재미있었다.

 

그리고 뒷편에 실린 식사 인터뷰. 다 별로였는데. 노라노와 김훈 이야기에 무릎을 쳤다. 특히 김훈. 내가 왜 먹을 것 얘기를 꺼려했는지에 대해 또 다른 뷰를 줬다. 나는 본래 간단하게 먹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 집이 그랬다. 고기도 별로 안좋아했고. 많이 먹지도 않았다. 오이지, 간장, 물에 만 밥, 가끔 참기름 호사. 이거면 된다. 그가 주문한 메뉴가 그거였다. 오이지, 조개젓, 된장찌개.

 

조개젓을 제외하고 오이지랑 된장찌개는 나도 집에서 자주 먹던 음식이다. 어렸을 때 할머니가 집에 계셨는데 그 때 오이지를 담그던 기억이 떠올랐다. 베란다 항아리에 오이를 담고 큰 돌로 누르던 기억. 그 돌이 보고 싶어서 항아리를 자꾸 열어봤다. 무말랭이 하려고 말리는 무도 언제나 바닥에 있었던 것 같다. 언젠가 한 번 이었지만 너무나 강렬했던 메주 뜨던 그 냄새. 내게도 먹을 거리와 관련한 아련한 이야기 거리가 있구나. 발견했다.

 

된장찌개를 끓이지 않은 이유를 고백했다.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웃었다. 찌개가 가장 어려운 음식이라고.

찌개는 어려워. 종합적인 요리잖아. 여러 재료가 들어가는데, 그 각각의 재료가 개별성을 잃으면 안돼. 그게 다 살아 있으면서 국물은 종합을 이뤄야 하고. 그 종합이라는 게 그냥 플러스의 결과가 아니야. 독자적인 새로운 결과지. 그러니 어려울 수 밖에. 된장찌개는 된장하고 소금으로 간을 해. 소고기는 극소량으로. 다이아몬드 넣듯이. 마지막에 풋고추를 약간, 던지듯이. 그럼 매운맛이 살짝 퍼지지. 된장은 융화력이 좋아. 고추장보다는 된장이 힘이 있지. 근원적인 힘이야. 심층부를 긁는 첼로의 음색 같은 것. 들떠서 날아가는 게 아니라 융합하는 맛.

음식은 상상력으로 하는 거야. 경험을 바탕으로 이것과 저것을 섞으면 어떤 맛이 나올 것이라고. 시행착오를 거듭해서 만드는 것. 우리 엄마들은 자기 생애를 통과해온 자기의 고유한 맛을 내잖아. 그건 계량화될 수가 없어.

<쓰고 달콤한 직업> 천운영 p.292 소설가 김훈을 이루는 맛

 

나는 뭘 써야 할지 모르겠는 현재의 두려움을 고백했다. 그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니야, 너도 확실히 갖고 있어, 쓰고 싶은 게. 있는데 뿌옇고 불투명하고 안 보이는 거지. 선명하게 드러나면 그때 쓰는 거잖아. 곁다리가 정리되고 그림이 보이기 시작할 때. 그냥 기다려. 나는 좀 시간이 없네. 이러다가 그냥 자연사할 수도 있고. 그래도 써야지. 한없이 써야지. 아직 앞날이 머니까.

나도 그처럼 노인이 되고 싶었다. 빨리 늙고 싶었다. 말이 나온 김에 물었다. 처음에 인터뷰 요청을 했을 때, 식당에서가 아니라 집에서 하자고 했던 이유를. 제가 식당 하는 거 싫으셔서 그런 거죠? 그거 보기 싫어서. 그는 맞다 틀리다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기본 태도를 가져야 된다고, 밥 벌어 먹고사는 것의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곤 실패하지 말라는 말을 다시 강조했다.

실패하면 안 돼. 돌파해야지. 산전수전 다 겪어야지. 더 겪어야 해. 사회 시스템을 제대로 알아야지. 그래야 노인이 되지. 다만 너무 오래 하지는 마. 글을 초조하게 쓰려고도 하지 말고, 억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지칠 때까지만 버텨.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눈물이 났다. 뭔가 알아준 것도 같고 질타를 받은 것도 같았다.

<쓰고 달콤한 직업> 천운영 p.298 소설가 김훈을 이루는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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