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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읽기/Apology

Day 2, 3 아무도 답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by 은지용 2024.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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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답변하지 않았기 때문

소크라테스 변론 읽기 Day 2, Day 3 | 소크라테스 <변론>을 대한 둘째 날과 셋째 날에는, 질문하고 답변하는 행위에 생각이 머물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제기된 혐의를 먼저 제기된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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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소크라테스 <변론>을 대한 날은, 질문하고 답변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제기된 혐의는 먼저 제기된 것과 나중에 제기된 것 두 가지가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먼저 모함을 한 자들은 변론을 제기하는 현재 법정에 모인 사람들이 어렸을 때부터 문제를 제기했다고 하네요. '소크라테스가, 잘난 양반이, 위로는 하늘을 조사하고 아래로는 땅을 연구하며, 사론을 정론으로 만든다고 (telling of one Socrates, a wise man, who speculated about the heaven above, and searched into the earth beneath, and made the worse appear the better cause)' 말이죠. '사론을 정론으로 퍼뜨린다'는 말이 영어로나 한글로나 좀 아리송합니다만, 대충 '안 좋은 언쟁을 좋은 것이라고 보이게 하는 것' 같아요. (챗 지피티와 브이클럽 합작 텍스트에는 he convinces people that bad arguements are good'이라고 풀어놓았네요. 
 
이런 말을 퍼뜨리는 사람들의 청중은 보통 '그런 질문자/연구자들(such enquirers)'이 신을 믿지 않는다고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네요. 게다가 그 수가 많고, 워낙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는데, 그렇다고 이 혐의를 기소한 사람들은 이름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실체가 없는 뜬소문인 거죠. 그림자나 메아리 같은 혐의인 셈이죠. 특히나 이런 뜬소문에 대해 답변해 주는 이가 하나도 없었기에, 그것은 디폴트/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고, 소크라테스는 피력합니다. The cause when heard went by default, for there was none to answer.   
 
잘못된 사실을 전하는 메아리에
누구도 답변하지 않았기에 디폴트가 되었다.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기에 기정사실화됐다.
 
누군가 답변하고, 또 누군가가 그에 대해 질문했었다면. 그렇게 질의응답과 건강한 이야기가 주고받아졌다면. 소크라테스의 설법에 대한 바람직한 토론의 장이 열렸을까요. 사사롭고 안 좋은 언쟁의 장이 되었을까요. 사실 메아리나 그림자 같은 모함에는 침묵이나 어둠으로 대응하는 게 현명할 듯합니다. 메아리랑 어떻게 싸웁니까. 에너지 낭비 아닌가요. 그런데 누군가 그 메아리에 답변하지 않고 그 메아리가 자꾸 퍼져간다면, 그 메아리를 기정사실화하는 세대가 생기려나요? 답변, 그리고 그것과 짝을 이루는 질문의 가치에 대해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실상 소크라테스는 그런 메아리들에 대해 웃어 넘겼던 것 같아요. 그를 풍자한 연극을 보고 웃고 나왔다고 전해집니다. 대응할 가치가 없어서 대응하지 않았겠지만. 한편으론 귀찮은 마음도 있지 않았을는지. 저에게 대중이 나쁜 놈이라고 한다면 아마 무섭고 두렵겠지만. 나이 70이 넘어서도 법정에서 스스로를 이렇게 변호할 정도의 멘털이라면, 그저 그 대응이 귀찮았을 것 같습니다. (부모를 전부로 아는 어린 아이한테도 질문하는 것에도 엄청난 인내심이 요구되더라고요. 그냥 지시하거나 시키는 게 편하죠.)
 
소크라테스가 자연철학 연구자들에 '질문자들 enquirers'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점도 눈에 띕니다. 당시 그들은 사회적으로 별로 좋은 시선을 받았던 것 같지 않습니다. 그 역시 '자연철학 연구자들을 깎아내릴 의도는 없다'면서도 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선을 긋거든요. 오늘날에는 과학자란 이름으로 존경받아 마땅하긴 하지만, 아니, 요즘도 좀 안 좋은 시선이 있던가요? 고대 그리스는 민주주의가 태동하고, 유일신이 아닌 여러 신을 섬겼는데도, 질문이 못마땅하고 신성모독이 중죄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문득 최근 보고 있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앞부분에 나오는 한 문장이 떠오릅니다.

 

나는 이 사소한 일을 통해
오해와 게으름이 간계나 악의보다
이 세상에 더 많은 혼란을 야기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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