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
머릿속에서 여러 목소리,
아니 하나의 목소리를 들었다.
소크라테스는 그 목소리를 다이몬이라 불렀다.
두 해 전 여름 강원도 해변에서 이 글귀가 적힌 책을 보면서 두둥-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들고 있던 책은 에릭 와이너의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당시 저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천천히 읽은 후 그 여진을 아직 느끼던 때였습니다.
'다이몬'이란 단어를 보자마자 데미안에서 말하던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데미안>이라는 이름도 다이몬과 비슷하잖아요.
다이몬 daimon, 데몬 daemon/demon이라는 것은 본래 그리스어에서 '산천 초목을 지배하고 인간 생활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치는 초자연적인 힘'을 지칭했다고 합니다. 옥스퍼드 사전에서 연관어로 제시된 것 중 하나가 '영감 inspiring Force'. (데몬은 기독교가 우세하게 되면서 악마라는 단어로도 자리 잡게 됩니다만, 그 이전에 이미 다른 뜻으로 존재하던 말로 보입니다.)
저는 이거다 싶었습니다. 진정한 나를 찾아 내면에 침잠 후 알을 깨고 나오는 이야기, 내 안에서 삶의 영감의 원천을 만나는 이야기! 네가 바로 그것이다! (https://thefinger.tistory.com/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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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풀먼의 판타지 소설 <황금 나침반>에도 데몬이 나옵니다. 여기서 데몬은 자신의 유일하고 특별한 반려동물이에요. 보통 반려동물처럼 아침에 집에 두고 출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함께하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분리될 수 없죠. 내 영혼의 정수를 형상화한 것에 가까워서, 데몬을 보면 상대방을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황금원숭이를 데몬으로 둔 사람은 금발에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보통 원숭이들처럼 위계질서에 엄격하고 욕심 많은 성격이라는 식입니다.
이 데몬도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온 걸까요?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의 데몬은 '쇠파리' 정도 될까요?
그는 스스로 자신이 아테네에 배정된 '쇠파리 gadfly'라고 <변론>에서 말합니다. 덩치가 크고 혈통이 좋지만 큰 덩치 때문에 굼뜬 편인 아테네에게 꼭 필요한 쇠파리. 어디서나 온종일 아테네 인들에게 내려앉아 일일이 일깨우고 설득하고 꾸짖는 존재라고 합디다. 참 언짢은 존재 아닌가요. 제 눈엔 그가 움직이는 대나무 회초리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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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몬이라는 단어가 참 매력적이었습니다.
현실을 초월한 이야기에 어울리는 개념이라 생각했습니다. 자연에 깃든 초자연적인 힘. 장대하고 새롭고 벅찬 생각을 불어넣어 줄 것 만 같은 엄청난, 미지의 풍경 같은 단어였습니다. 동시에 발 한 번 잘못 내딛으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긴장감도 풍겼습니다. 자칫하면 '악마'의 개념에 닿아버리니까요. 어디선가는 '수호천사'나 '분신'의 느낌도 풍겼고요.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읽는다 했을 때 다이몬 얘기가 나오겠구나, 은근히 기대했죠.
그런데 <변론>에
다이몬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아요.
지금까지 안 나왔고, 슬쩍 뒤를 봐도 없습니다. 비슷한 개념을 말할 때 소크라테스는 '소리 the voice'라고 짧게 말했을 뿐입니다.
내면에서 소리가 들리는 신기한 경험이라 '초인간적인 현상 the divinity'란 말을 쓰긴 했지만, 그 어디에도 '영감을 주는 진정한 에너지의 원천'이나 '영혼의 정수' 같은 환상적 뉘앙스를 내뿜지 않습니다. 같이 읽는 톡방의 설명영상에서 언급되지 않았다면, 이 부분, 모르고 지나쳤을 정도입니다.
나는 어떤 신적인 또는 초인간적인 현상을 경험했는데, 멜레토스는 고발장에서 이를 희화화한 바 있습니다. 그런 현상은 내가 어릴 때부터 시작됐으며, 일종의 소리로서 내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타날 때마다
언제나 내가 하려던 일을 하지 말라고 말렸지, 해보라고 권유한 적은 없습니다.
the divinity which Meletus ridicules in the indictment. This sign, which is a kind of voice, first began to come to me when I was a child;
it always forbids but never commands me to do anything which I am going to do.
그 목소리는 뭘 하라고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저 어떤 일을 하지 못하게 했다네요. 그래서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어느 해전에서 승전한 장군들을 불법적으로 단체 기소할 때 반대했고 (아테네가 승리한 유일한 해전이면서, 폭풍우 때문에 아군 사체와 부상병들을 챙기지 못했던 아르키누스 해전) , 스파르타에서 파견된 30인의 독재자들이 법에 반하는 명령을 내렸을 때에도 이를 거부하고 혼자서 조용히 집에 갔다는 겁니다.
옳지 않은 일을 막는 내면의 소리?
양심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구글에 양심 Conscience 검색해 봤습니다. 위키백과가 먼저 말합니다. 양심은 '선악을 판단하는 의식'으로 '자기가 행하거나 행하게 되는 일, 특히 나쁜 행위를 비판하고 반성하는 의식'이네요. 옥스퍼드 사전도 비슷한 설명을 합니다.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데 가이드가 되어주는 내면의 느낌이나 소리 Inner Voice.
conscience : an inner feeling or voice
viewed as acting as a guide
to the rightness or wrongness
of one's behavior.
그동안 제가 소크라테스 다이몬에 대해 오해했던 모양입니다. 그가 말한 내면의 소리, 다이몬은 양심에 가까워 보입니다. 다이몬이란 단어에서 환상을 덜어냅니다. 소크라테스의 플레인 다이몬. 그것은 양심이었나 봅니다.
양심은 감성과 이성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요.
감성은 내 기분을 더 중요하게 볼 테니까, 양심은 감성보단 이성이랑 더 잘 지낼 것도 같네요. 제가 사는 시대의 수많은 티브이쇼와 광고는 물론이고, 정치인들도, 사람들의 이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거든요. 디자인도 감성적으로 하지 이성적 또는 양심적으로 한다고 말하진 않습니다.
시대가 잘못되었다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지금이 좋습니다. 옳고 그름에 목매는 시대에 살고 싶지 않네요. 좀 융통성 있고 이왕이면 죄책감을 덜 느끼는 곳이 좋습니다. 하지만 어쩐지 소크라테스가 본다면 혀를 찰 것 같습니다.
https://brunch.co.kr/@7bef61f7eaa249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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