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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읽기/걸리버여행기

거인국 속 소인의 자세

by 은지용 2024. 4. 12.

 
"키 작은 게 나빠?"
 
저희 둘째의 말이었어요. 유치원에 다닐 때였나. 그맘때 아이들에게 늘 하듯 '잘 먹어야 키가 쑥쑥 큰다'라고 했는데. 아이가 곰곰 생각하더니 진지한 얼굴로 되묻는 거예요. 키 작은 게 나쁜 거냐고.
 
저는 키가 작습니다. 대한민국 여성 평균 신장에 크게 못 미칩니다. 그렇다고 제가 키 때문에 나쁜 인간이 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다만 좀 불편합니다. 만원 지하철 속에서, 사람들 아래에 파묻히면 공기가 더 답답하거든요. 어디선가 방구냄새가 풍겨오면 정말 괴롭습니다. 큰 사람들은 알기 힘든 디테일이죠. 북유럽 여행 중에 키가 2미터 50은 되는 듯한 거대하고 건장한 노숙인을 보고 내심 두려워했던 기억도 납니다. 분명 같은 인간이지만 같지 않았습니다. 그가 머리카락과 수염을 휘날리며 걸어오는데 땅도 울리는 것 같았어요.
 
저는, 엄청나게 거대한 북유럽의 그 사내보다는, 비슷한 몸집의 동양 사람들이. '좀 더 동등한 조건에서', 대등한 눈높이로, 친밀한 대화가 쉬울 것 같습니다. (남편과 친밀한 대화가 잘 안되는게 혹시 덩치 차이 때문인 걸까요?)
 
이번 주 분량에서 걸리버는
우연히 거인들의 나라에 도착합니다.
 
1부의 소인국 릴리펏과 완전히 다른 경험이죠. 거인국의 이름은 브롭딩낵 Brobdingnag. 넓고 건장하다는 의미를 지닌 Broad란 단어를 꼬아놓은 것 같은 이름입니다.
 
걸리버는 이번 여행에서 아주 납작 엎드립니다.
 
그의 생존은 거인들의 자비에 기대는 수 밖에 없었거든요. 비굴하지만 최대한 공손하게 살려달라고 간청합니다. 거인 왕과 어느 정도 관계가 안정된 후 그가 본국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하거나, 스스로 인간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하는 행동은 그들을 그저 웃게 만듭니다. 
 
<걸리버 여행기>가 쓰인 후 한참 후인, 1906년, 미국 브롱크스 동물원에 피그미족 청년이 새끼 오랑우탄과 함께 철장 안에 갇혀 1주일간 전시되었던 것처럼. 비슷한 경험도 합니다. 그 청년은 고형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수년 뒤 자살했지만, 걸리버는 목숨을 부지하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https://namu.wiki/w/%ED%94%BC%EA%B7%B8%EB%AF%B8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인들은, 문명의 수호자 유럽인으로서, 자부심이 뼛속까지 채워 넣어져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걸리버는 사실 그 자부심이 단순한 크기 차이일 수도 있다고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크기에서 비롯된 무력의 차이랄까요.
 
만약 유럽인이 소인 취급당하는 대륙이 발견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만약 당시 영국이나 스페인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서 자행했던 것처럼, 더 덩치 크고 힘센 사람들이 그들 땅에 왔다면 같은 일을, 약탈을, 당했을까요?
 
걸리버 여행기의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는 '역지사지'의 천재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어쩜 그렇게 모두가 당연하다 여겼던 일을 뒤집어 생각해 볼 수 있었는지.
 
걸리버가 전하는
브롭딩낵 왕의 한 마디가
오늘따라 마음을 불편하게 쑤십니다.
 

인간의 장엄함이라는 것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저처럼 작은
벌레만한 사람들도 흉내를 내다니 말이오.

How contemptible
a Thing was human Graneur,
which could be mimicked by
such diminutive insect as I.

P.129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현대지성
P.96 Jonathan Swift <Gulliver's Travels>, Oxford

 
 
Contemptible=dispicable 경멸받을만한
Grandeur=grand 장엄함, 위엄
Diminutive 매우 작은
 



 
정말, 작은 것은 나쁜 것일까요?
달팽이보단 참새가 되는 것이 조금 나은 삶일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T_k6SCfzyL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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