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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클로스딜레마/첫째 그리고 둘째

돼지 엄마

by 은지용 2024. 7. 29.



다 같이 식사하는 저녁 자리에서
수저 한 번 더 놓는 수고 할까봐 전전긍긍
한 놈은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 숟가락 놓고
다른 놈은 아무것도 안하고 무표정으로 버티기
아이코야 그렇게 손해보는게 두렵니
네 친절 닳을까 아깝니?

저녁 먹기 전 숙제 할 땐
한 글자라도 더 읽을까봐
하나라도 더 익히는 노력을 할까봐 노심초사
그래서 그렇게 필사적로 핸드폰에서 눈 안 떼고
슬라임, 만화책에서 손 안 떼고
최선을 다해 뒹굴거리니?

이 와중에
밥 한 그릇씩 잘도 넘어가더라
그래 그렇게 치킨 먹으니 좋더냐
아무 말 없이 꾸역 꾸역 먹는게 좋더냐
주말에 못 한 설거지 방학 때 한다더니 했냐

덕분에 나는 체한 기분
먹지 않고 집 나와 조용한 곳이다만

집 나설 때 현관에서
어떤 한 마디가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잘 먹고 잘 살아라 돼지들아”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 <돼지책>이 이해되던 순간이었다. 엄마가 그저 밥 해주고 살 찌우고 키워주는. 우리를 청소하고 적당히 관리해주는 존재가 될 때. 나는 돼지들의 엄마가 된 듯 했다. 썩 기분이 좋진 않았다. 마음의 성장도 좀 나눠주면 안되겠니.

생각이 이쯤 다다르면 요상한 걱정으로 발전한다. 아이들이 서른 넘어서도 독립하지 못하고 품안에 두고 업고 살아야할까봐. 평생 헤어지지 못할까봐. 두려워진다. 일어나지 않은 미래인데. 아주 사서 걱정을 하고 있다.

아이는 믿어주는만큼 큰다는데
왜 이렇게 믿기가 어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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