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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그사람은

혈액형과 별자리

by 은지용 2010. 8. 8.

 

혈액형과 별자리가 첫 만남에 미치는 영향 <2010. 봄 혹은 여름. 홍대입구>



혈액형과 별자리.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를 맺는데 이것을 참고한다. 또 많은 사람들이 이것과는 전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지낸다. ? 나는 중간쯤 된달까.



내 주위 어떤 친구들은 '걔는 A형이거든'이란 말을 종종, 아니 상당히 자주 하며 지내고, 또 어떤 친구들하고는 혈액형에 대해서는 고등학교 이후로 거의 말을 꺼내본 적이 없으니까. 왜 그 영화 '달콤살벌한 연인'이던가 거기서 남자주인공이 여자가 혈액형으로 뭔가를 설명하려고 할 때마다 불편해하던 모습 그게 나다.



솔직히 말해 나는 내가 매우 흔한 성격으로 묘사되는 A형도 O형도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내 별자리가 보수적인 땅의 성질 중 하나라는 점이 불편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직장에서는 이런 소재의 이야기를 절대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적어도 누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왜냐하면 그건 너무 ... 너무 ... 뭐랄까 ... 어려보인달까.
또 한편으론 그런 분류가 순진무구한 체 하는 폭력처럼 느껴진다. 넌 피가 이러니까, 넌 별자리가 이러니까 라고 가능성을 언어에 가둬버리는 것은 너무 잔혹하지 않은가. 사주를 해석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말이다.



업무상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어지간히 친해지거나, 그에 대해 관심이 지대하지 않는 한 혈액형에 대한 얘기는, 당연히, 꺼내지 않는다.


나는 선을 또 다른 업무의 하나로 봤던 걸까.
그 자리에서 혈액형이나 별자리에 대해 말 꺼내본 적은 이 사람을 만난 전후로 (기억에 의하면) 전혀 없다내가 꺼내지도, 상대방이 꺼내지도 않았다. 이 사람을 보기 전까지는, 또 그 후로도 지금껏 그런 적 없다.



이번에 만날 남자는 모 통신사에 재직중으로, 본인 명의로 아파트가 있단 얘기도 프로필의 한 줄 이었지만, 그것보다 졸업학과가 흥미를 끌었다. 항공우주학과. 전공이 전공이다보니 사실 다소간의 상상력을 기대하며, 그래, 조금 기대하고 나갔다.

언젠가 내가 졸업한 대학 학과의 교수님은 "이 세상에서 지금 이 강의를 듣고 있는 문화인류학과 학생들과 천문학과 애들이 또라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때가 4학년때였던 것 같다. 잠이 확 깨는 말이었는데, 문화인류학 강의를 하는 교수님도 또라이 중 하나라는 보충설명이 있었다. 요는 남들이 경영이니 영문이니 취업에 효율적인 공부할 때 그것과는 거리가 먼 내용을 배워보겠다고 있는 우리(?)가 참 안쓰럽기도 하고 뭐 그렇다는 거다.

상상력에 기초한 채 현실에 조금 기댄 또라이.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 밤하늘은 마음을 두근거리게 한다. 중학교때로 기억한다. 친구와 집에 오는 길에 계단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다, 문득 저 별빛이 몇 억년 전의 빛이라는 사실에 전율하던 때가 있었다. 아니, 사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시 선 얘기로 돌아가, 쨌든 좋았다. 선을 통해 만나는, 어른의 눈에 괜찮은, 10년 전에 누군가 ' 10년 뒤에 뭘 하고 있을 것 같아'하고 물었을 때 '결혼하고 애 낳고 잘 살고 있겠지'라고 망설임 없이 답할 수 있는 사람보다는 조금 또라이 기질이 있는 것이 신선하겠다 생각했다. 안 그런가? 아닌가?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 많은 기대를 했던 모양이다.



장소를 홍대로 잡았지만 막상 만나고 나니 아는 곳이 하나도 없다며 나에게 계속해서 어디로 갈까요를 묻던 당황스러운 질문도, 어쩌다 들어간 쌀국수집에서 시킨 맛대가리 없던 조개쌀국수도, 시종일관 잘난척하며 자기네 회사의 누군가를 내리까는 듯한 말투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냥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생각하다가 중간중간, 왠지 사실은 열등감이 많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 정도. 상처받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정도. 그게 다다.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내가 커피라도 살 차례가 된 것 같아, 또 조금 더 얘기를 나누고자 홍대 앞 스타벅스에 갔다.
내가 아래층에서 주문을 할까 서성이는 동안 그는
윗층에 자리를 알아보러 갔다. 나는 뭐 야외에도 자리가 있으니 저기서든 어디서든 떠들면 되겠지하는 마음으로 일단 커피를 주문했다.

그는 내려오더니 별로 앉을 공간이 없다고, 애들 모여서 스터디하고 하는데 (역시 약간 깔보는 듯한 말투) 나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이미 커피는 생산된 상태. 나보고 성격 급한편인 것 같다며 나도 그런가 하며 노닥노닥했던가, 그러다 물었는지 그 전에 물었는지 조금 가물가물한데, 어쨌든 그 즈음 그가 내 혈액형을 물었다.

질문 자체에 당황했는데 설상가상으로 그는 내가 AB형이란 사실을 그렇게 달가워 하는 것 같지 않았다. A형이길 바랬던 것 같은 눈치랄까.


잘은 모르겠지만, 기억도 잘 안나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가 내게 혈액형을 물어봤다는 것이다. 그것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미 그는 호감도를 잃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며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여행 좋아라하는 사람이 우습다는 듯한 말투로) 얘기하던 모습, 대학교 엠티 때 배낭 매고 어디 강원도랬나 갔는데 고생만 죽어라 했다고 넌더리를 치는 모습을 보며, 다소간의 '또라이'를 상상했던 내 기대가 무참히 무너질 때까지도 뭐 그럭저럭... 괜찮았나. 그래, 괜찮은 편이었다.



길을 걷는 와중에 내게 별자리 마저 묻고, 전갈자리와 염소자리가 잘 어울릴 확률에 대해 그의 스마트폰으로 뭔갈 검색하기 전까지는. 그래서 그 결과가 20점이라던가... 뭐 아주 형편없다는 것을 알기전까지는.


도대체 왜. 뭐가 그리 급해서 그랬을까. 정 궁금하면, 집에 가서, 아니 나랑 헤어진 후에 찾아보면 될 것을 왜 굳이 내 앞에서 그걸 찾아봤을까. -


대충 전갈자리와 잘 어울리는 별자리는 뭐, 뭐, 뭐 이렇게 기억하고 다니면 안되나. 그건 12별자리 곱하기 12별자리 총 144개 경우의 수를 다 외우고 다닐 수 없다고 부연까지 할 필요가 뭐 있었나. 휴-



나는 그것을 그의 업무능력의 전문성과 나아가 생활력에 대해서까지 의심이 들게 하는 중요한 단서 중 하나라고 여기고 있는 듯 하다. 간단히 말해, 전혀 쿨해 보이지 않는다.

물론 다정해보이지도 않는다, 전혀.


그렇게 만나서 반가웠다는 인사를 하고 연락두절했다.


나 같은 생각을 하거나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 흔치 않은 걸까. 흔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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