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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그사람은

마지막 선 혹은 소개팅

by 은지용 2010. 8. 8.


선 혹은 소개팅의 한계를 느끼다 <2010. 8월. 강남역>


어제 마지막 소개팅 아니 선을 봤다
.

이제 더 이상 부모님
(전부 엄마쪽이긴 했지만)을 통한 만남은 그만하겠다고 선언하는 날 이 사람의 번호를 받았다. 일의 선후는 이 사람의 번호를 받은 날 속에 있는 말을 꺼낸 것 뿐이지만, 적어도 가족에게는 선언의 형태가 아니고선 표현이 안되는게 천성이다.



선을 그만하겠다고 선언한 이유

부모님을 통한 자리에서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는 너무 적나라한 이윤추구 같아서랄까. 한계를 느꼈다.

나와 어떤 기억도 공유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 지극히 피상적인 참하다착하다 어느 대학출신이다 설계사다 회계사다, 경우에 따라서는 편부모이긴하지만 본인 명의로 아파트가 있다더라 등등의 정보부터 얻고 싶진 않다는 것을, 그런 소개에서 마음을 열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선을 시작한지 7년이 지나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마지막 선에 대해 얘기하자면, 우선 날씨가 엉망이었다
.

 
덥고 습한 8월의 토요일. 비가 오락가락했는데, 강남역에서 내려 약속장소로 움직여야 하던 때 비가 엄청나게 내렸다. 말 그대로 퍼붓는 비라, 우산을 써도 온 몸이 젖어버리는 그런 날이었다


도로에 미처 빠지지 못한 물이 갈팡질팡하며 샌들 신은 발을 적시는 엄청난 날씨였다. 사실 그게 은근히 신났다. 선이고 뭐가 그냥 비 맞으며 걷다가 흠뻑 젖은 채로 집에 가서 씻고 자는 것이 간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씻김과 혼란이 좋았다. 묘한 카타르시스의 매력이 있었달까.



약속상대는 버스정류장을 잘못 내려 우산을 하나 급히 사고 그 빗속에서 어찌저찌 약속장소로 오느라 옷이 다 젖었다. 그래서 살짝 나온 배와 엉덩이가 민망하게 보였다. 그치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유쾌하다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뭐 나도 착한몸매에 긴 생머리에 므흣한 얼굴은 아니니 그만하자.

쨌든, 서로 딱히 단정하다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만나, 딱히 훌륭하지 않은 음식을 먹으며 나눈 얘기는 … 놀라웠다. 적어도 내게는 매우 놀라웠다.


놀랍도록 나와 취향이 비슷하고
, 행동양식이 닮아서 놀라웠다.

혼자 여행하고, 출장시 자가운전보다는 기차나 버스 등을 이용하며 짬짬이 여유를 즐기고, 같은 다큐를 봤고, 다큐 프로를 좋아하고, 클래식부터 가요나 팝송 등 듣는 음악범위나 넓어 좋은 건 좋아한다는 것도. 한 번 꽂힌 음악은 몇 번이고 반복재생해서 듣는다는 뭐 그런 것들.

심지어 묻히는 목소리와 얼굴을 갖고 있어, 식당직원을 불러도 잘 못듣는 경우가 많거나 자주 방문해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스타일이라는 것 까지도.



설계사라는 직업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

한국 도시 60년의 이야기를 즐겁게 보고 있고, 언젠가 고건축을 활용한 나만의(?) 내 친구들만의(!)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싶은 소망을 갖고 있는 내게 특히 매력적인 직업으로 보였다. 난 왜 건축을 공부하지 않았지 하는 반성이 들게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저거구나 생각하게 싶을 정도로.



뭐. 중간중간 보이는 그의 다듬어지지 않은 콧털이나 졸린 목소리가 집중을 방해했고
. 구두 신은 나만한 기럭지도 그의 매력을 반감시키는 요인이 되긴 했지만, 취향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또 나도 다리 제모를 깔끔하게 한 상태가 아니었고 (사실 잘 안 한다, 귀찮고 할수록 모공도 넓어지는 것 같은데다 또 한편으론 털이 뭐 어때서 하는 조금의 반항심도 있다), 게다가 내 언변 역시 결코 역동적이진 않으니까. 그런건 덮어둘 수 있었다.



하지만 어제 오후 헤어진 이후 잘 들어갔냐는 문자 한 통 없다
. 이것도 나랑 너무 같다. 같아도 너무 같다.
아니 예전의 나와 같다고 해야하나.

어찌됐든 그는 어지간히 내가 마음에 안들었나보다. 보통 그 정도는 다들 해주는 게 예의 아닌가. 물론, 내가 이 말을 하면서도 뜨끔하긴 하지만, 또 답문을 제대로 안해서 틀어진 경우도 있긴하지만. 만나기 직전까지 주고받은 다정한 문자들과 비교해본다면, 참 대조적이다.



이번이
3번째 같다. 좀 괜찮다 싶은 또라이를 만난 것이.

그리고 이번에 확신하게 된 것이 있는데, 그들은 나에게 꽂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극은 밀어낸다.

그들은 외롭지 않다, 흥미로운 자신과 세계가 있으므로. 그들은 결혼이 뭐 그렇게 급하지 않고 오히려 조금 두려울 것이다, 자기세계가 전염되거나 무너질 수 있으므로. 은연중에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결론내렸다
. 소개팅이나 선은 그만해도 된다.

어른의 소개로 일단 마음을 놓지 못한 채,피상적이고 제한된 소개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지는 만남은 아무리해도 공허할 뿐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이제 그만,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는 수단으로 결혼을 생각해선 안되겠다. 혼자 독립해서 잘 살아갈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나을 듯 하다. 그러다 좋은 사람만나면 그 때 다시 생각하면 되지.



내 나이 서른 둘
.

쇼는 그만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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