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작가 모임에서
고전 문학과 음식을 시작하면서
음식을 먹거나, 요리하는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왠지 모를 거부감이 있다. 그게 무엇일까. 왜일까. 나도 모른다. 집에서 요리를 하긴 한다. 먹기 위해 한다. 먹어야 살고, 먹여야 할 어린 식구가 있기 때문에 한다. 아이들 수유와 이유식의 시기에는 나름 할만큼 했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그 시간은 어쨌든 지나갔다. 지금은 최대한 간단하게 해 먹는다. 거추장스러운 요리는 딱 질색이다.
그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라면이다. 아이에게 해주긴 꺼림직하지만. 간단하고, 스스로 해 먹기 쉽고, 빠르다. 천사 그림이 그려져 있던 해피라면, 일요일엔 내가 요리사 짜파게티, 10대 때 친구들과 아파트 옥상에 쪼그리고 앉아 부셔먹었던 아무 라면, 캐나다 토론토 스텔라 아줌마가 후식으로 추천해 준 오징어짬뽕, 놀러가면 식사대용으로 좋은 사리곰탕면과 미역국라면. 다 좋다. 1년 남짓한 해외 생활에서도 제일 먹고 싶던 한국 음식은 라면이었다. 김치 없이는 살아도 라면 없이는 살기 어렵더라.
그렇다고 먹는 것이 귀찮다거나 입이 유난히 짧다거나 하진 않다. 맛있는 것 좋아하고 나름 가려 먹는다. 쌀국수 한 그릇을 먹어도 속이 차는 진한 국물이 좋고, 제육볶음 한 그릇을 먹어도 이왕이면 언젠가 남도 여행 때 만났던 그 한상차림의 제육볶음이었으면 좋겠고, 핫도그를 먹어도 언젠가 설악산 아래에서 쌀쌀한 날 맛본 방금 튀긴 그 맛이었으면 좋겠다. 라면도 옛날 어느 한옥집에서 뚝배기에 끓여주던 것이 좋다. 내가 해 먹는 것이 귀찮을 뿐, 누군가 차려주는 정성스러운 음식에는 애정이 간다.
내가 자라날 때에는 음식 이야기나 요리 이야기가 흔한 주제가 아니었다. 당시 집에서 '노는' 전업주부들을 위한 '한가한' 오전 프로그램의 테마였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 남자 셰프 이야기가 주말 저녁 시간대에 등장하기 시작하더니, 연예인 집 주방 이야기도 메인 시간대에 편성되기 시작했다. 유튜브에는 몇 만명씩 시청한 '영화나 드라마 속 나온 음식 만들기 영상'이 흔하다. 먹는 방송은 조금 결이 다르려나. 분명한 것은 요리하고 먹는 이야기가 이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콘텐츠라는 것.
왜 그럴까. 왜 음식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끌까. 또 왜 내게는 끌리지 않는 걸까. 요리하고 먹는 것에 대해 얘기하거나 영상을 찍는 것은. 또 그런 영상을 시청한다는 것은. 뭔가 내 존엄의 밑바닥을 건드리는 기분이다. 나의 프라이버시를 건드린달까. 이번 기회에 이 기분나쁨을 들여다봤다. 그러다 발견했다. 역설적이게도, 내 마음속 케케묵은 질문은 먹는 것에 관한 것이다. 크게 두 가지인 이 질문들은 아직 충분히 답변되지 못한 채 남아있다. 하나는 섭취와 배설의 과정, 다른 하나는 음식들 본연의 생애에 관한 것이다. 이들은 나의 20대를 움직인 테마이기도 하다.
질문 1> 소화의 과정은 왜 역행할 수 없는가
매콤하고 달달하면서도 뜨끈한 토마토 해산물 파스타를 먹고 싼 똥과, 달콥 쌉싸름한 봄 두릅을 먹고 싼 똥 모두 혐오스럽다. 그 똥으로 미트볼을 만들어본다 한들 본래의 음식 근처도 가지 못한다. 10대 때 삼류만화가를 꿈꾸던 나는 20대에 아마추어 만화 동호회지에 그 내용으로 4컷 만화를 그렸더랬다. 미트볼 파스타를 먹고 싼 똥으로 미트볼을 만들어 보는 이야기. 도대체 몸속에서 무슨 과정이 일어나는 걸까. 내 몸 안에 내재한 함수가 어떤 식이길래, 맛있는 음식을 고 따위로 바꿔놓는가.
이제는 그냥 받아들인다. 똥을 먹을 수 있게 바꾸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미생물의 영역이다. 장내 미생물 활동이 두뇌활동보다 우위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바로 수긍했다. 미생물은 인간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리고 인간은 그저 먹고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가 날 때, 좀 더 세상에 좋은, 아니 그냥 살아가는 일을 하면 될 뿐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살아있는 새우나 꽃게를 쪄 먹을 때 생각한다. 살아있는 것을 취하고 얻은 에너지로 나쁜 일 하지 말고 착하게 살자고.
질문 2> 내게 에너지를 주는 근원은 과연 무엇인가
두툼한 패티를 지글지글 구워서, 돔같은 빵 사이에 끼워 먹는 햄버거를 좋아한다. 양상추나 토마토, 양파를 넣어 먹으면 더 맛있다. 탄산음료와 감자튀김을 곁들이면 얼마나 좋은지. 그런데 궁금했다. 도대체 이 재료들은 어디서 어떻게 공수되는 것일까. 이들의 근원은 무엇일까. 내가 먹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무엇이 내게 숨 쉬고 움직일 힘을 주는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의 일원으로 일해야 할 시점이 됐을 때, 먹을거리와 관련 있는 1차 산업 전문신문에 지원했다. 돈도 벌고, 궁금증도 해소하는 일석이조라는 계산이 있었다.
나를 받아준 곳은 1차산업 전문지 중에서도 축산업 관련 분야를 다루는 부서였다. 양계장, 양돈장, 소 키우는 목장 등을 다니며 내 식탁 재료들의 현실을 봤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소비자의 입장에서만 본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의 입장으로 봤다. 그래서 유기농이 1차 산업의 미래라거나, 고기나 우유를 얻는 방법으로 방목이 모두를 위한 해답이라고 선뜻 말하기가 어렵다. 하와이에 산다고 암에 걸리지 않거나 염증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처럼. 유기농이나 방목이 모두의 행복을 보장한다고 말하기 어렵더라.
사람들이 사는 일상과 축사를 집으로 두는 가축의 일상이 크게 달라 보이지도 않았다. 축산업을 실제로 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이래라 저래라 해야 하는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환멸도 있었고. 영어로 되어 있는 콘텐츠를 이해하고 싶은 나의 욕심도 있었고. 썩 내키진 않지만 도피 후 갈 곳도 있었고. 이래 저래 나는 신문사에서 도망쳤다. 그리고 나의 질문은 여전히 남겨져 있다. 사는 게 그냥 그런 거지 뭐 하는 체념 섞인 수용이 나의 남겨진 질문들에 물들었다.
엄지작가 모임을 통해 접한 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에서 내 마음에 특히 울림을 준 코멘트가 '식사하세요'였다. 내 20대를 움직인 저 두 가지 테마가 작용한 것 아닐까. 이제 돌아보니 그런 영향이 있던 것도 같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숭고하고 고귀한 존재고 뭐고 간에, 일단 먹고 싸면서 살아야하는, 유한한 우리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았달까. 문학이란 장르를 통해 조금 우아하게, 그러나 적나라하게 인간의 치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내가 먹는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내 치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이 치부는 어찌보면 지극히 인간적이다. 최근 우연히 보게 된 김영하의 <작별인사>에 인간처럼 먹고 싸는 로봇이 등장한다. 스스로 로봇이라 인식 못하고 사람이라고 느낀다. 충전지나 화석연료가 아닌 음식을 섭취하고 에너지를 얻는 존재. 그래서 배설도 하는 존재. 인공지능이 논문도 쓰고, 소설도 쓰고, 바둑도 두고, 그림도 그리고 음악도 만드는 시대이다. 인간 형태를 한 로봇이 가장 마지막으로 장착할 기능 중 하나가 정말 음식 섭취와 배설의 메커니즘일 것 같다.
로봇에게 인간적 감성을 심어주기 위해 <작별인사>에 나오는 설계자는 주인공 로봇을 고전 문학에 노출시킨다. 빨강머리 앤, 오즈의 마법사 같은. 유한하고 그래서 종종 비합리적인 인간의 판단과 감성을 장착한 그 로봇은, 훗날 인공지능이 더 이상 인공(人工)이 아니게 되는 시점까지 살아 남는다. 다른 '지능'들과 함께. 그리고 그 '지능'들에 인간성을 공유하고 부여한다. 가장 인간적인 특성은 정말 오랜 시간 이어져 온 고전 문학의 등장인물들에게 있을 것이다.
요즘. 나의 40대를 움직이는 테마는 고전문학이다. V-Club에서 시작된 엄지작가란 모임, 최근 시작한 B-Club의 고전 극단적으로 천천히 읽기, 아이들에게도 고전문학을 접하게 해주는 나의 요즘 일상은. 분명 고전문학에 방점을 찍고 있다. 엄지작가 모임에서 고전문학과 더불어 요리와 음식 이야기로 테마를 구체화했다. 고전 문학 속의 음식을 직접 요리해보기도 하고 먹어보면서 지금을 사는 우리와의 연결고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어허. 내 안에서 20대와 40대가 만나야 할 것 같다. 지금 읽는 과거의 이야기. 어쩐지 고전문학과 결이 닮았다.
인간적인 것을 탐구하는 것. 고전 문학과 음식을 탐구하는 것은 나의 유한함, 필멸에 대한 성찰이다. 이렇게 보니 인간에 대한 학문인 인문학에 요리가 빠져있는 게 이상하다. 사람들이 고전 주변을 기웃거리거나, 먹을 것에 큰 관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 같다. 먹을 거리의 근원이 궁금하고, 고전 문학을 찾고, 아이를 키우고,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성을 탐구하고 나를 탐구하는, 이런 수순으로 지금의 이 테마는 필연적으로 다가온다. 음. 이제 시작할 마음이 든다.
그래도. 엄지작가 모임에서 손 대는 요리가 최대한 간단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멋진 신세계>의 '소마'나 <이방인>의 '밀크커피' 같이. '라면'을 언급한 고전 문학 어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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