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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작가/고전문학 속 음식 그리고 수다

빨강머리 앤 「통닭구이네요!」

by 은지용 2023. 5. 1.

 

그날 초록 지붕 집에는 닭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마릴라는 앤이 나흘간의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 통닭구이를 준비했다. 요즘처럼 30일 만에 키워 파는 고기용 닭이 따로 있었을 것 같지 않던 그 시대에, 마릴라는 달걀을 내주는 귀한 닭을 잡았다. 외국 영화에서 보이는, 추수 감사절에 커다란 칠면조 고기를 저녁식사로 준비하고 온 식구가 둘러앉아 먹는 장면이 연상된다. 혹시 그날은 추수감사절 즈음 되었을까. 쌀쌀한 가을밤이었으니 비슷한 시기였을 것도 같다. 집집마다 불이 켜지기 시작하던 그 가을밤에, 앤은 다이애나와 함께 시내의 다이애나 할머니 댁에서 나흘간 도시 생활을 즐긴 후 시골 초록 지붕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빨강머리 앤의 그 장면을 보면서 온 가족 월례행사로 먹을까 말까 했던 전기구이 통닭이 기억 저편에서 떠올랐다. 그 닭고기는 다리, 날개 부분을 구분해 자르지 않고 대체로 온전한 한 마리의 형태를 하고 있었으며, 튀김옷을 입지 않았다. 앤이 먹었을 통닭구이는, 왠지 1990년대 전후에 내가 가족들과 먹던 전기구이 통닭에 가까울 듯 하다. 1800년대 후반, 1900년대 초반에 시골에서 기름에 닭을 튀기진 않았을터. 마릴라는 전기 오븐이 아니고 불을 피우는 오븐을 썼을테니 맛은 조금 다를지 모르겠으나, 그녀의 통닭구이는 모양새와 냄새가 내 기억 속 전기구이 통닭과 비슷할 것 같다.

 

 

전기구이 통닭에 대한 기억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린 직후부터 1990년대 초중반, 나의 초등학교 시절에 머물러 있다. 부모님은 튀긴 것 보다 담백한 음식을 좋아했다. 소화력이 그리 좋지 않은 집이었다. 튀긴 닭, '후라이드 치킨'은 언감생심이었다. 후라이드 치킨의 튀김 옷은 내게는 거의 닭이 입는 이브닝 드레스처럼 현실감이 없어 보였다. 물론 중학교 이후부터는 친구들과 KFC에 가면서 자체적으로 욕구를 해결했다. 좀처럼 외식이 없던 시절이었다. 부모님은 맞벌이셨고, 그나마 아빠는 거의 항상 해외출장중이었다. 가끔 어떤 날, 아마도 월급날이었거나, 아빠가 귀국했거나, 엄마가 직장에서 특별수당을 받은 날이었을 것 같다. 몇 번인가 전기구이 통닭을 먹으러 갔다. 그런 날은 매우 특별했고, 무척이나 기다려졌다.

 

 

가게는 어두컴컴했다. 집 근처 지하철역 가까운 곳에 위치한 그 곳은 학교보다 멀었다. 초등학교 때 학교 보다 멀리 가는 경우는 별로 없었기에 그 가게까지 가는 날은 정말 특별한 날이었다. 가게에서는 영롱하게 빛나는 통닭들이 꼬챙이에 끼워져 돌아가며 노릇하게 익어갔다. 통닭과 함께 채썬 양배추가 나왔다. 어린 나는 항상 마요네즈보다 케첩이 훨씬 더 좋았지만, 채썬 양배추에 대해서만큼은 마요네즈를 허락할 수 있었다. 두 소스가 같이 섞여야 더 맛이 났다. 고기는 후추 섞인 소금에 찍어 먹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꼭 맥주를 팔 것 처럼 생겼는데, 맥주를 마시던 사람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사실 누구와 같이 갔는지도 가물가물하다. 부모님 옆에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있었나. 모르겠다. 그저 빙글빙글 돌아가던 노릇노릇한 통닭이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그 가게가 얼마나 오래 영업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식용유가 보급되면서, 기름에 튀긴 닭과 양념소스를 버무린 치킨이 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 즈음 슬그머니 전기구이 통닭 집은 사라졌던 것 같다. 집 가까운 곳에 생긴 처갓집과 페리카나 치킨집이 들어섰다. 다른 치킨집도 더 생겼다. 뱅글뱅글 꼬챙이에 끼워져 익어가던 통닭은 건물을 나와, 길가 트럭에서 그 명맥을 이어갔다. 지금도 가끔 두 마리 2만원 하는 전기구이 통닭 트럭을 본다. 치킨의 시대, 전기구이 통닭은 치킨 세상의 가장자리에 있다. 뼈 없이 짭조름하거나 매콤하고, 화려한 튀김 옷을 입은 '치킨'에 밀려서. 전기구이 통닭은 지금도 변방에 있다.

 

 

보통은 흔히 보기 힘들지만, 내가 사는 동네에는 전기구이 통닭집이 있다. 통닭, 통돼지바베큐, 골뱅이무침, 3가지 메뉴 뿐인 곳이다. 동네이긴 하지만 거리가 있어 항상 알고만 있던 곳인데. 빨강머리 앤을 보고 난 후, 그 통닭이 먹고 싶어졌다. 처음 방문한 가게는 노부부가 할 것이라 생각됐는데, 예상과 달리 30대로 보이는 젊은 부부가 일하고 있었다. 마릴라를 기대하고 갔는데 앤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남자 분이 전기 오븐을 열고 꼬챙이에서 닭 한마리를 빼서, 쿠킹호일에 닭을 싸줬다. 겨자소스와 후추섞인 소금도 함께 챙겨줬다. 채썬 양배추가 없는 것은 아쉬웠지만. 마릴라가 앤이 돌아오길 기다리던 마음을 떠올리며, 기분좋게 전기구이 통닭을 사갖고 왔다.

 

 

식탁에 풀어보니 꽤 먹음직스러워보였다. 아이들은 물론 기름에 튀긴 '치킨'을 더 좋아했다. 짭조름하게 염지된, 뼈도 없어서 먹기 편한 요즘 '치킨'은 너무나 강력한 경쟁자다. 옛날에는 '라떼는' 이런 통닭을 먹었다며 한 마리 닭을 열심히 발라줬다. 그렇게 옛날 얘기를 하며 남편과 나는 맛있게 먹었다. 아이들은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고, 우리는 맥주를 곁들이며 마지막까지 통닭을 해치웠다. 이 메뉴는 아이들과 공유하기 보다는 부모님과 같이 먹는 것이 더 어울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나중에야 들었다. 가게가 혹시라도 없어지기 전에, 전기구이 통닭을 들고 부모님 댁에 가야겠다. 그 때는 채썬 양배추를 준비해서 같이 먹으면 더 좋겠다.

 

 

개울에 놓인 통나무 다리를 건널 때 초록 지붕 집의 부엌에서는 앤이 돌아온 것을 반기듯 불빛이 깜박였고, 열어둔 문안에서는 은은한 난롯불이 쌀쌀한 가을밤을 가르며 붉은 온기를 전했다. 앤은 발걸음도 가볍게 언덕을 달려 부엌으로 뛰어들었다. 따뜻한 저녁 식사가 차려진 식탁이 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릴라가 뜨개질감을 접으며 말했다.
"그래, 왔니?"
"네, 아, 돌아오니 너무 좋아요. 전부 다 입을 맞춰주고 싶어요. 시계한테도요. 아주머니, 통닭구이네요! 절 주시려고 한 건 아니시겠죠!"
앤이 기쁨에 들떠 말했다.
"너 주려고 한 거지. 오느라 배가 고팠을 테니 맛있는 걸 먹고 싶었을 게 아니냐. 어서 옷이랑 갈아입어라. 오라버니가 오시는 대로 저녁을 먹자꾸나. 돌아와서 기쁘구나. 네가 없는 동안 어찌나 허전하던지. 나흘이 이렇게 긴 줄 몰랐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앤은 매슈와 마릴라 사이 난롯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동안 있었던 일을 전부 들려주었다.
앤은 행복하게 이야기의 끝을 맺었다.
"정말 멋진 시간이었어요. 제 평생의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좋았던 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p.411 <빨강머리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 더모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