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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일기/늘푸른지

여수기행

by 은지용 2011. 4. 27.



 

<2011. 3. 여수>

 

봄 마중은 역시 남도로 가야 한다. 그 마음 하나로 새벽녘 서울 용산에서 전라선을 탔다.
전주를 지나면서 나를 제외한 모든 승객이 서로 아는 것처럼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더니, 차창 밖으로 비치는 논밭이 제법 파릇하다. 노란 꽃봉오리가 맺힌 성질 급한 산수유도 금방 스쳐갔다. 그러다 느닷없이 너른 바다와 큰 배들이 등장했고, 열차의 종착역 전남 여수에 도착했다.

 

 


* 서 너 걸음마다 이순신과 바다

 


낮 기온이 10도 이상 올라간 푸근한 날이었다.
여수역에서 여행객들에게 차를 빌려주는 아저씨는
큰 눈과 둥근 쌍꺼풀의 전형적인 남방형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역시 남쪽이구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차를 빌려 처음 간 곳은 국보급 목조건물, ‘진남관(鎭南舘)’.
여수 시내에 위치해있고 입장료도 없어서인지
푸근해진 날씨를 즐기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열 살이 채 안돼 보이는 아이들 무리는 노래에 맞춰 율동을 추고 있었고,
어떤 커플은 마루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진남관을 이루는 기둥은
그 둘레가 두 팔을 넘길 정도로 크고 위용도 대단하다.
조선시대 전라좌수영의 객사이기도 한 이 목조건물은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지휘소로 사용한 진해루 자리에 세워졌다.

 

여수에는
이순신 유적이 많다.
거북선을 최초로 만든 선소,
이순신의 사당인 충민사,
전쟁 중 어머니 변씨를 모셔온 곳 등이 그것이다.

오죽하면 여수시 스스로 ‘서너 걸음 마다 이순신이 보인다’고 수식할까.

 

여수에는 또
바닷가 언덕마루를 품은 조망 좋은 장소들이 꽤 있다.
진남관이 위치한 곳 역시
여수 앞 바다와 이순신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트인 장소다.

특히 돌산공원은
추천할만한 전망 좋은 곳 중 하나.
여수시에서 돌산대교를 건너자마자 위치해있는데,
가파른 언덕배기에서 시내와 바다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

 

돌산 공원 벤치에 앉아 둥글게 베인 여수항,
섬들이 흩어져있는 먼 바다와 그 위로 부서지는 햇빛,
오가는 배가 물 위에 그리는 궤적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왠지 마음이 느긋해진다.

 

 

 

 

* 두 세 걸음마다 돌산갓과 봄

 

봄 오는 걸음걸이만큼이나 느긋하게
돌산도 남쪽 끝자락 향일암(向日庵)을 향해 차를 몰았다.

어느덧 항구도시의 흔적은 사라지고
마늘이 한 뼘 이상 자란 밭과 눈 녹은 빈 논이 이어진다.

머리에 수건 두른 아낙들은 이른봄 햇살을 받으며
밭을 일군다.
허리 굽혀 등을 동글게 말고 일하는 모습들이
구불구불 시골길과
뒷산 봉우리 모양새와 잘 어울린다.

 

둔전마을쯤이던가,
가던 길을 멈추고 밭일하는 할머니 한 분과 담소를 나눴다.
오면서 마늘 사진을 찍었다 생각했는데, 문득
이게 마늘인지 파인지 헷갈려서 시작한 짧은 대화였다.



“안녕하세요, 말씀 좀 여쭐게요. 이게 마늘인가요? 판가요?”
난데없는 질문에 할머니는 기꺼이 작업하던 손을 놓고 카메라 액정을 유심히 들여다보신다.
“이기 마늘인가 다마내긴가… 눈이 어두워갔고 잘 안 보이네. 그런데 이 갓은 안 찍소?”


할머니의 한 마디에
그제서야 여수 돌산갓이 눈에 들어왔다.

주위에 정말 갓이 지천이다.
대표 특산물 돌산갓을 일깨워준 것에 고마워하며, 건강하시란 인사를 남기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아까의 마을에서 언덕 하나 넘으니 아예 ‘돌산갓정보화마을’이 등장한다.
도로변에는 갓김치 판매장과 체험장이 자꾸 눈에 띄더니,
향일암 앞에는 갓김치 가판대가 즐비하다.

갓김치의 고장답다.

 

 

* 먼 바다가 전하는 봄 소식


향일암 앞 골목길에 배어 있는 갓김치 냄새가 나쁘지 않다.

가판에는 말린 굴과 홍합도 많은데,
밥에 넣거나 조미료로 국물 낼 때 쓰면 좋다고 한다.

그 알싸하고 비릿한 향에 홀려 저녁밥을 제 양보다 더 먹은 듯 하다.

 

동 트기 전 향일암에 올라
넓은 바다 위로 떠오르는 붉은 아침 해와 대면한 것도 좋았지만,
봄이 저만치 오고 있는 것을 느끼는 데에는

동백섬 오동도와 건어물 시장 산책이 그만이다. 

 

오동도 동백은 추웠던 지난 겨울 날씨 탓에 아직
봉우리만 맺힌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오동도 바닷가 너른 바위에 앉아 마주 바라봤던
먼 바다에서 불어온
얼핏 온기 섞인 바람과,
시장 풍경에 묻어나는 생기는
봄이 지척에 와있음을 알기에 충분했다.

 

 

동박새는 잘 지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