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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일기/늘푸른지

고창, 붉은 흙에 물드는 붉은 단풍

by 은지용 2010. 11. 21.








가을이 간다.


늦기 전에 시 한 수 읊으며 붉은 단풍 아래에서 그보다 더 붉은 술 한잔하고
, 바람처럼 흩어질 가을을 즐기는 호사를 부려보자. 노릇노릇하게 익은 풍천장어 소금구이는 안주. 술은 복분자로 담근 것이고, 읊을 시는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라던 서정주의 자화상이다.

 




*붉은 흙에 물드는 붉은 단풍

고창 어딘가를 달리다 차를 멈췄다. 주변을 둘러보니 멀리 어리는 높은 산 앞으로 고만고만한 구릉 밭이 펼쳐진다. 무 배추가 한창 자라는 밭도 있고, 아직 작업이 남은 노란 논도 있다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제 막 수확을 끝낸 듯 비어있는 붉은 땅


고창의 흙은 붉다.


땅이 열매도 물들이는 걸까. 고창의 특산물은 덩달아 붉은 빛을 띤다. 복분자는 겉과 속이 모두 검붉고, 속이 빨간 것으로는 수박을 들 수 있으며 고구마와 땅콩은 불그스름한 껍질을 갖고 있다. 모두 고창의 명물이다.


붉은 빛으로 치자면 고창의 단풍도 유명세를 탄지 오래다. 선운산 단풍은 두 말이 필요 없으며 이보다 덜 알려진 문수사의 나이든 단풍 숲과 고창에서 장성 넘어가는 꼬불꼬불 길 또한 그 붉은 운치가 뒤지지 않는다


나는 문수사에 가는 길이었다.

아침나절 도착한 문수사 앞 단풍나무 숲. 아담한 사찰 앞 12㎡에 수령 100년에서 500년된 단풍나무가 가득하다. 수많은 단풍잎이 높은 가지에 걸려 하늘을 뒤덮은 모습이 마치, 낮에 뜬 은하수 같다.

10월 중순에 시뻘건 붉은 빛을 기대할 순 없었다.
다만 문수사 아래 문수계곡에서 그 붉은 빛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 소리 잔잔한 계곡 아래 단풍나무가 점점이 서 있는데 위쪽부터 햇빛에 데인 것처럼 빨갛다. 좀 더 천천히 (아마도 글을 올리는 이맘 때) 문수사에 갔더라면 그런, 수박 같고 고구마 같고 복분자 같은 고창의 빨강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고인돌도 식후경
고창에서 복분자주 한 잔 안 하면 섭섭하다.
복분자는 이미 수확이 끝난지 오래라 냉동된 것 밖에 구할 수 없지만, 술은 익을수록 맛이 난다


선운사 앞 특산물판매장은 물론 도로변의 주조장 직영 매장, 고창읍 주변의 농산물산지유통센타 모두 복분자 제품을 구비하고 있다. 어지간한 식당은 직접 담근 술도 팔고 있으니 어디서 마실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찰떡궁합 안주, 장어구이는 집을 잘 골라야 한다토박이들만 안다는 고창읍내의 진짜 풍천장어 집을 찾았는데, 식당직원이 장어가 구워지는 동안 손도 못대게 한다.

선운산 옆을 흐르는 인천강은 바다와 민물이 드나드는 풍천이다. 여기서 잡히는 풍천장어는 특히 지방질이 적고 맛이 담백하다




드디어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고창 장어!
 


한 점 들어 생강 채 썬 것과 깻잎 장아찌에 싸서 먹어보니, 양념이라곤 소금 밖에 없는 것이 어떻게 이렇게 달달하고 고소한지. 달콤쌉사름한 복분자주 한 잔 곁들이니 앉은 곳이 천국이다.



가볍게 한잔 한 후 산책하기 좋은 곳으로 고인돌유적이 있다

고창 전체가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이 분포된 국제적인 유적군으로 총 7갈래의 탐방길이 조성돼있다. 이 중 가장 긴 것은 오베이골탐방로로 3km내외다. 대부분이 0.5km 안팎 산책로로 전부 다 돌아봐도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산책로 옆 넓은 들에 조성된 소란한 코스모스와 해바라기 군락이 함께 어울려 놀 만하다.


 



*그리고



고창읍성도 걷기에 그만이다. 특히 외벽의 조명이 잘 돼 있어 야밤 산책에 좋다.
매일 밤 10시 반까지 개방되며, 돌을 이고 한 바퀴 돌면 다리 병이 낫는다는 속설이 있다. 다만 내부는 캄캄하므로 달 밝은 날을 고르거나 동행을 둘 것을 권한다.



고창에는 인물이 많다.

읍성 인근에는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의 고택이 있다.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 창업주 김성수,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인 전봉준, 명창 진채선 모두 고창사람이다. 지금 가는 심원면 질마재는 국화 옆에서로 잘 알려진 시인 미당 서정주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질마재 아래에는 옛날 시골학교를 개조한 미당 문학기념관이 있다



 
다른 기념관과 조금 다른 것은 그의 시와 일상 가운데 친일행적과 관련된 것도 고스란히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의 작업이라면 아름답고 추하고 옳고 그르고를 떠나 모두 내보이는 대담함이 인상적이다.




시인의 공간은 서정적이다


건물 외벽은 붉은 물이 들기 시작한 담쟁이가 차지했다.
기념관 옥상 전망대에 오르니, 멀리 서해바다와 변산반도를 배경으로 벽화가 아름다운 안현마을, 그리고 노란 셀로판지를 댄 듯한 가을 들판이 한 눈에 들어온다.


기념관 마당에 설치된 거대한 바람의 자전거옆에는 그의 시 '자화상'이 적혀있다. 시의 일부를 옮겨본다.




  스물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八割(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이는 내눈에서 罪人(죄인)을 읽고가고
  어떤이는 내입에서 天痴
(천치) 읽고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서정적이고도 대담한 시인의 감성에 마음이 동했다
지척인 바닷가로 내달려 지는 해의 붉은 빛에 갯벌이 벌개지는 것을 마냥 바라보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