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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일기/늘푸른지

기찻길 옆 한약사랑방, 제천

by 은지용 2010. 11. 21.


 

날이 제법 쌀쌀해졌다. 너무 더웠던 여름을 지낸 터라 찬바람이 반갑다.
다만 초가을 바람에 색이 바랜 나뭇잎 따라 마음도 알싸해지는 것이, 어디든 훌쩍 바람 쏘이러 다녀와야만 할 것 같은 충동이 인다. 홀가분하게 떠나는 길, 자유낙하하는 낙엽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기차를 이용해보는 것은 어떨까
.
이번에는 영동선, 충북선, 중앙선이 교차하는 청풍호반의 고장, 충북 제천에 다녀왔다.


 



*
기찻길의 사랑방, 제천


 

  기차를 타는 것은 정해진 운명을 따르는 것과 같다.


  시각에 맞춰 열차에 올라타기만 하면
, 우리는 누군가 놓아둔 철로와 정해진 노선을 따라 예정된 장소, 약속된 시간에 도착한다.

물론 출발시각을 맞추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열차 대합실에서 종종 목격되는 플랫폼으로 전력달리기 하는 사람이 그 증거다. 본인도 그 중 하나였음을 고백하자면, 기차에 올라탄 직후 정말 한동안 숨도 제대로 못 가눌 정도로 뛰었다. -.



  일단 올라타니 예정된 열차에 동승했다는 안도감이 밀려온다. 창 밖으로 스쳐가는 풍경을 바라보자니 가쁜 숨이 잦아든다. 차창은 평화로운 풍경을 비추는 무성영화의 스크린이다. 황금빛 논과 마을, 터널과 간이역이 스쳐 지나가길 2시간, 제천에 도착했다.




  함께 제천으로 온 승객들이 역에서 모두 빠져나가길 기다리며 역사를 찬찬히 둘러본다.


 
철로는 꽤 복잡하게 놓여져 있다
여러 갈래의 길이 교차되는 철로를 바라보는데, 대기중이던 화물차 외에 또 다른 화물열차가 제천역을 통과해 지나간다. 그 사이 서울 청량리에서 달려온 기차는 안동을 향해 아스라히 멀어져 가고, 맞은편 플랫폼에는 강원도행 무궁화호가 승객을 기다린다.





  충북 제천은 우리나라의 중앙선
, 영동선, 충북선이 교차하는 지점. 청량리에서 원주를 거쳐 제천을 잇는 것이 중앙선, 제천에서 정선 방향으로 이어진 것이 영동선, 충북선은 대전에서 제천까지 이어진다.


  지역관리역제가 실시되던 과거만큼은 아니어도, 제천은 여전히 환승역으로서 또 열차의 사랑방으로서 분주한 운명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 운명을 증명하듯 이 날 역 주변에는 꽤 큰 5일장이 열렸다.

 


*
약채락, 약이 되는 채소의 즐거움



  3일과 8일에 열리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었던 것이다


 
오일장의 입구는 할머니들의 다홍색 고무다라가 장식했다. 다라 안에는 제천의 명물, 잘 익은 사과가 한가득이다. 추석직전의 장이라 그런지 이른 시간에도 서울 명동역만큼이나 사람들이 북적인다.

 
 
제천은 사과 말고도 황기 등 각종 한약재로 유명하다.

  제천시에 따르면 전국 약초의 80%가 이곳을 거쳐간다고 한다. 10 16일까지 한달여간 열리는 한방엑스포 개최기간과도 겹쳐서인지, 약재상들이 역 바로 앞 명당을 차지했다.


  
사슴 뿔 모양의 녹각영지, 제천 황기와 감초 등이 지천이다


  한약재 중에서도 황기는 제천의 대표음식 약채락의 주재료이기도 하다.

 
약이 되는 채소의 즐거움이란 뜻의 약채락은 우수농산물 인증을 받은 황기와 오가피, 뽕잎 등이 들어간 약초비빔밥. 비빔밥에 들어가는 고추장양념은 특허출원번호가 따로 있을 정도로 귀한 몸이다
.



  담백하면서도 달콤 쌉싸름한 약채락은 제천시와 한국식품연구원이 함께 연구개발한 음식으로
,  제천시에서 딱 9곳에서 맛 볼 수 있다. 의림지 인근의 성현’, 청풍호 가는길의 원뜰’, 제천시청 주변 비원등이 그곳으로 약채락 이외의 메뉴는 다들 조금씩 다르다.


 

이번에 들른 곳은 청풍호 가는 길의 원뜰이었는데 홍화가루로 노랗게 물들인 김치와 곤드레나물 장아찌가 밑반찬으로 나왔다.


  ‘
약채락한 그릇 먹고 창문너머 노르스름하게 익은 논을 바라보며 후식으로 직접 담근 매실차까지 한 잔 하니,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는 기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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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바람의 호수, 청풍호


  제천은 물과 인연이 깊다



 
예부터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으로 수운이 발달한데다 북쪽에는 우리나라 농경유적이라 할만한 최초의 저수지 의림지가 있으며, 남쪽에는 충주댐으로 생겨난 충주호가 있다
.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제천사람들 중 그 누구도 충주호를 곧이곧대로 부르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
 
맑은 바람의 호수, ‘청풍호가 충주호의 제천식 이름이다
.


  호수는 거대하고 고요하다.

 
수상스키와 번지점프 등 레저스포츠를 즐기는 이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사람들의 소리는 호수 가득한 물방울과 물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느라 말이 없는 산 숲에 묻혀버리기 일쑤다.





  청풍 나루터에서 1시간 반짜리 왕복 유람선을 타면 단양 장회나루까지 다녀올 수 있다. 호수 위를 유유자적하며 옥순봉, 단양 구담봉 등 퇴계 이황선생이 이름 붙였다는 기암괴석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나루터 인근에는 청풍호 최고의 조망터가 있는 청풍문화재단지가 위치했다. 청풍명월의 고장이라 하여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느낄 수 있는 곳이련만, 돌아가는 기차시간을 맞추느라 달을 놓쳤다.




  거대하고 고요한 산과 호수 위에 떠올랐을 두 개의 달과 바람을 떠올려본다.
 
누가 보든 말든 오늘도 청풍호에는 맑은 바람이 불고 밝은 달이 뜨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