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평창기행 <2010. 7월호>
덥다. 연일 3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에 예년보다 일찍 시작된 장마로 습도도 높아 후텁지근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때 간절한 것이 한 줄기 시원한 바람. 하지만 바람이라고 모두 같지는 않다.
해발 700m 건너편 산마루에서, 도는 저 멀리 동해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에어컨이나 선풍기의 그것과 종자부터 다르다. 눈에 보이지도, 손으로 잡을 수도 없지만, 찰나의 기억만으로도 한여름 더위를 즐길만하게 바꿔주는 바람을 찾아 평창으로 향했다. <편집자주>
대관령 고원 위에 부는 바람은 잠이 없다. 해발 1140m 드넓은 초지 위에 저 멀리 강릉 바다가 어렴풋이 보이는 이 곳에서 바람은 어쩜 이리 쉬지도 않고 불어대는지. 여기는 바람이 1년 365일 24시간 드나드는 터미널, 삼양 대관령 목장 동해전망대다.
시야는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도 시원하게 트여있다.
멀리 보이는 것은 첩첩이 쌓인 산 또는 바다다. 붕- 붕-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거대한 바람개비 모습의 풍력발전기는 능선을 따라 줄줄이 바다 바라기를 하고 섰다. 강원도 땅이 분명한데, 풍광은 확실히 이국적이다.
이런 멋진 풍경 앞에서 '외국같다'는 말은 참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게, 지금 보이는 모습은 유럽 알프스 어디쯤, 하이디가 나올 것 같은 풍경의 그림엽서와 너무 닮았다.
목장 전망대는 입구에서 셔틀버스로 20여분 거리다. 전망대부터 목책을 따라 푸른 초원과 숲길, 자유롭게 노니는 소, 염소 등과 노닥거리며 쉬엄쉬엄 걸으면, 입구까지 약 1시간 30분~2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여차하면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입구로 내려와도 된다.
이 곳의 명물 중 하나가 동틀 무렵의 운무. 목장 측 설명에 따르면 바람에 따라 안개가 흐느적 거리며 사위를 감췄다 드러냈다 하는 모습이 일품이란다. 아직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건 왠지 제목이 '한국의 산하'쯤 되면 사진집에서 종종 볼 수 있을 법한, 지극히 한국적인 풍경인 듯 해 마음이 좀 놓인다. 외국 속에서 한국을 만난 것 같은 기분 이랄까.
* 감자 꽃 필 무렵
목장에서는 아니지만, 이번 여행에서도 하룻밤 비를 만나 골짜기 마다 이는 상서로운 운무에 흠뻑 취한 바 있음을 고백한다. 다만 여름철 강원 평창 골짜기에 피어오르는 운무는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매력이 있으니, 산 비탈마다 자리잡은 넓디 넓은 고랭지 채소밭이 그것이다.
6번, 31번 국도 뿐 아니라 각 지방도로 모두 길 따라 펼쳐진 높은 산 비탈은 거의 예외없이 감자 밭을 품고 있다.
고개를 넘을 때 마다 펼쳐지는 감자밭, 감자밭, 감자밭. 메밀처럼 큰 키에 늘씬한 멋은 없어도, 낮은 땅에서 수줍은 듯 당당하게 꽃대를 올린 하얀 감자 꽃 무리가 대관령 목장 못지않은 서정적 풍경을 자아낸다.
평창은 매년 8월경 열리는 강원 감자큰잔치의 개최지로 감자를 특산물로 꼽는다. 대관령 인근은 농진청 고랭지 농업 연구소의 주소지이며, 농심 감자연구소도 평창을 본적으로 한다.
안타까운 것은 6월초 난데없이 내린 서리로 올해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경우가 속출했다는 것. 실제 대관령 중턱의 바람마을 의야지 일대를 지나니 그대로 말라버린 감자밭이 계속되는 게 마음이 짠했다. 이 와중에 무럭무럭 자라나 꽃까지 피운 다른 감자들이 기특하다 못해 고맙더라.
산비탈 마다 가지런한 것은 비단 감자만이 아니다.
고개를 넘어가면, 어떤 마을은 옥수수가 더 많고, 또 어떤 곳은 배추가 눈에 띈다.
모두의 초록이 다르다. 감자의 초록이 수수하다면, 옥수수의 초록은 반들반들 밝은 빛이 나고, 배추의 초록은 꽃처럼 화려하며, 파밭의 초록은 푸르기 그지 없는 청록이다.
감자음식이야 강원도내 어느 곳에 가도 흔히 볼 수 있지만, 관광지 가운데 적정 가격에 분위기까지 갖춘 곳으로 평창의 남쪽 끝 미탄면에 위치한 영화 '웰컴투동막골' 촬영장을 꼽겠다.
입장료 없는 촬영장 산 중턱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주막이 2~3채 있는데, 단돈 3000원이면 방금 감자를 갈아 구운 바삭한 감자전을 맛볼 수 있다. 몇 천원 얹으면 메밀꽃동동주나 옥수수동동주 한 잔 거나하게 걸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에는 하도 조용하고 한적해, 주막집 아주머니가 지직거리는 대로 틀어둔 라디오를 타박하기도 미안할 정도의 분위기라면 설명이 될까.
* 허브 향에 취하고 오대산 숲길에 취하고
봉평은 사람 복작거리는 맛이 있는 동네다. 겨울에는 휘닉스파크에서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로, 여름에는 물 맑은 흥정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기며 메밀요리를 맛보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그 중에서도 흥정계곡 상류에 자리잡고 있는 허브나라농원은 눈과 코가 즐거운 곳이다. 세이지와 타임, 레몬버베나 등이 심겨져 있는 정원에 서면 허브가 내뿜는 향긋한 냄새와 물소리에 기분이 좋아진다. 매우 아기자기하게 조성돼있어, 연인이나 가족과 함께 시간 보내기 좋고 덤으로 예쁜 사진도 남겨올 수 있다.
내친김에 향기에 푹 취해보고 싶다면 토종 허브를 찾아가보는 게 어떨까.
이런 경우라면 오대산 앞 산채정식 집이 제격이다. 한 상 가득 차려지는 제각각 다른 향과 이름의 산채나물 향연이 놀랍다. 세조가 요양을 다녔다는 상원사와 그 길목의 월정사 앞 나이 많은 전나무 숲에서 마음과 몸 속을 씻어낸 후 맛본다면 금상첨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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