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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일기/늘푸른지

봄 햇살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충남 논산

by 은지용 2010. 5. 18.
2010년 4월 논산기행 



봄이면 찾아오는 그 분이 오셨다. 오후면 어김없이 온 몸을 나른하게 만드는 춘곤증. 꽃나무는 해가 높아지면 형형색색 화려한 망울을 터뜨리는데, 사람이란 동물은 빛에 이렇게나 다르게 반응한다. 대책 없이 피곤한 우리 몸에 필요한 것은 상큼한 비타민 C. 마침 세상에는 봄이 제 철이며 비타민 C가 풍부한 과일이 있다. 딸기! 그래서 이번에는 충남 논산의 딸기 체험농장을 찾았다. 



* 비닐커튼 안 비밀의 정원으로


비밀의 정원에 들어서듯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내딛는다.
비닐하우스의 하얀 비닐 장막을 걷고 들어간 딸기 농장 안은 달큰한 향이 살짝 감도는 듯도 하고, 햇빛이 유난히 눈부신 듯도 하고, 바깥보다 좀 더 따뜻한 듯도 하다. 입고 있던 외투는 얼른 벗어버렸다. 온실 속의 화초란 말처럼, 커튼 안의 세계는 밖과 참 다르다. 꽃 사이를 오가는 꿀벌들은, 이미 꽃에 온 정신이 팔려 인기척은 안중에 없다.


이런 곳에서 딸기가 자라는구나. 


일요일 오전 10시. 다소 이른 시각에 찾아가서인지, 체험손님이 아직 없었다.
하우스 안의 쭉쭉 길게 뻗은 딸기 밭 안에 나와 일행 뿐. 농장주에 따르면 학교수업이 없는 토요일, 일명 '놀토'에는 단체체험 손님이 종종 있지만 이른 오전이나 일요일에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오는 편이라고 한다. 아침부터 수선을 떤 보람이 있다.
하하.






농장주인의 간략한 체험안내가 이어졌다. 딸기농사가 올해로 13년차인 논산농원 김상중 대표는 “한 번 잡은 딸기는 가볍게 톡 떨어뜨리듯 떼어내면 된다”며 한 번 딴 딸기는 바닥에 버리지 말고 반드시 먹어달라고 했다. 바닥에 떨어진 딸기가 썩어 다른 딸기의 생장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또 "딸기는 그대로 따서 먼지정도만 닦아내면 먹을 수 있다"며 오히려 향과 맛을 제대로 즐기려면 너무 오래 씻지 않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보통 딸기 밭에서 놀 수 있는 시간은 1시간 정도로 제한되기 마련인데, 이번엔 주인분이 인심 쓰셨다. "천천히 드시고 싶은 만큼 드시다 가세요." 이런 인간적인 에누리가 도시와 구분되는, 시골농장의 즐거움이 아닐까.


조금 어수룩하긴 해도 이곳은 놀이공원 같다.
농장에 따라 딸기를 밭에서 직접 따 먹는 것 외에 딸기 인절미 시식, 딸기로 잼이나 비누 만들기, 나물캐기, 잔치국수 먹기 등 어른 아이 모두 빠져들 수 있는 체험이 가능하다. 이중 딸기 인절미는 찹쌀과 콩고물 사이에서 딸기 씨가 씹히는 것이 상큼 달콤해, 밥을 먹고도 뭔가 허전하다 싶을 때 후식으로 그만이다. 무료시식에 염치없이 손을 뻗는 것으로 모자라, 귀가 길에 별도 구매해가는 손님도 적지 않다고.


경기도 일대에서는 1만5000원 내외의 체험료로 딸기를 따서 싸갈 수 있도록 하지만, 논산지역에서는 농장 안에서 실컷 먹을 수 있게만 하되 체험료를 1만원 수준으로 조금 낮게 책정했다. 그게 논산 지역 체험농가의 약속이라고 한다. 체험과 별도로 농장에서 딸기를 바로 구입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가까이서 맡아보니 시중에서는 맡을 수 없는 신선한 딸기 향이 진하다. 신선한 딸기가 1kg 스티로폼들이 한 박스에 6000원 수준이다.



*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농장 입구에서 저 끝까지 딸기 밭 이랑 사이를 왔다갔다 천천히 산책했다. 자세히 보니 딸기도 사람처럼 제각각 생겨 먹었다. 서로 다른 품종이 심겨져 있기도 했지만, 같은 하우스 안에서 어떤 것은 길쭉하게 자라고, 어떤 것은 둥글둥글하게 커가며, 또 개중에는 동물을 닮은 듯 특이한 모양새로 자라는 것도 있다.

 

갖가지 모양의 딸기를 맛보는 종종 부러진 줄기가 눈에 띈다.
체험객 편의를 위해 하우스를 높이고, 딸기 밭을 지상에서 1m정도 올려 설계했는데, 이 '배려'로 아이들이 뛰어다니면서 생긴 상처다. 꺾인 줄기에 맺힌 딸기는 뿌리로부터 영양을 받지 못해, 붉게 철들지 못하고 마냥 초록 청춘만 살다 진다고 한다.

이를테면 요절하는 셈이다.


딸기는 다른 과일과 달리 한 번 맺힌 제 자식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단다. 보통은 하나의 가지에서 잘 자랄 것 같은 과실을 선택해 영양을 듬뿍 주는 대신 일부 과실의 생육은 식물 스스로 포기한다. 하지만 딸기는 한 번 맺힌 열매를 떨어뜨리는 법 없이, 전체 딸기 크기가 조금 줄어드는 상황을 감수하면서 골고루 사랑을 나누어준다나.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더니.

딸기가 요절하는 자식을 보지 않도록 농장에 가면 조금 조심하는 게 딸기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 그들에게도 춘곤증이 있었을까

돌아가는 차 안에도 딸기향이 묻었다.

산지에서 바로 구매한 딸기 한 박스, 딸기 인절미, 여기에 덤으로 인심 좋은 주인으로부터 받은 딸기 모종까지 안고 가서인가. 그렇게 달큰한 냄새에 들뜬 마음으로 23번 국도를 탔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예전부터 들러보고 싶었던 백제유적지 무령왕릉과 계룡산 밑 동학사 벚꽃길고 구경할 요량으로 시작한 드라이브였다.


동학사 뿐 아니라 공주 박물관의 유려한 벚꽃은 아쉽게도 아직 이었고, 공주 무령왕릉은 따뜻한 일요일 오후의 봄 햇살과 산수유를 즐기는 가족단위 상춘객들이 제법 있었다. 능 위 잔디밭에 누워 봄빛을 희롱하다, 문득 1000년도 더 전에 이 충남 일대 땅에 살았던 백제 사람들도 딸기를 즐겨 먹었을까 하는 물음이 생겼다. 당시 사람들도 봄에는 적잖이 나른했을 텐데 말이다.


후에 알아보니, 백제에 살았던 조상님들은 지금의 딸기 맛을 몰랐을 공산이 크다.
오늘날의 딸기는 18세기 유럽에서 육종된 것을 근간으로 개량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조상님들은 봄 딸기 맛을 몰랐다니, 안타깝고 또 한편으로는 송구스럽다.



다시 서울로 차를 몬다.

충남 일대 평지를 달리며 보이는 딸기 하우스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그 반사된 빛 때문에 하우스들이 언뜻 언뜻 바다 같다는 착각을 하게 한다. 겉보기와 달리, 물 아래 평소 우리가 접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간직했으니, 바다가 맞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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