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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일기/늘푸른지

정남진 봄 마중

by 은지용 2010. 5. 17.
2010년 3월 장흥기행


연일 남풍이 따사롭다. 유난히도 춥고 눈이 많던 겨울을 지낸 터라 남쪽으로부터의 봄소식이 마냥 반갑다. 한반도의 봄이 제일 먼저 오는 곳은 남도, 그 중에서도 서울의 정 남쪽에 자리한 전남 장흥은 그 중 첫째가 아닐까. 겨울의 끝을 알리는 동백과 봄철 키조개, 표고버섯의 향기가 봄철 아지랑이 마냥 오감을 간질이는 그곳, 장흥에 다녀왔다.


* 남쪽으로


아직 깜깜한 새벽, 우리나라 지리표시의 기준점인 서울 광화문의 정남쪽을 향해 차를 몰았다. 목적지는 전남 장흥.

남풍을 좇아 밤을 달리다 동녘에 빨간 해가 떠오른건 서천이나 영광을 지날쯤이었다. 동 트는 하늘에 비친 산 그림자의 나뭇가지는 분명 앙상했건만, 정남진의 나무들은 과연 달랐다.

군내 곳곳 가로수로 심겨진 종려나무와 여기저기서 눈에 쉽게 띄는 동백나무는 이미 한여름 초록 잎을 양 손에 이고 있다. 널찍이 펼쳐진 논밭의 이랑고랑은 보리와 잡초, 쪽파 등으로 한껏 연두 빛 물이 올랐다. 쪽파 밭에서 쪼그리고 앉아 일하는 한 무리의 아낙네가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도 들린다.

보리는 곧 바람에 이리저리 살랑일 것이고, 사방천지 소곤소곤 물이 오르기 시작한 연두 빛은 봄을 지나 여름까지 신나게 짙어지겠지. 이런저런 연상 가운데 장흥 사금마을, 정남진 바닷가에 이르자, 이번에는 바다의 쪽빛 파랑이 감각을 자극한다.



사금마을에는 해안을 따라 드라이브 코스가 잘 마련돼 있다.

풍광이 빼어난 바닷길이건만, 강릉 정동진만큼 유명세를 타지 않아서인지 관광공해가 없다. '관광지 바닷가'하면 으레 있을법한 호객행위나 서투르게 세련된 척 하는 이름과 요란한 간판으로 무장한 모텔도, 난립한 식당가도 딱히 눈에 띄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관광객이 왔다 해서, 하던 그물손질을 놓지 않는다. 그 친절한 무심함에 조용히 불어오는 봄바람이 더 따뜻하고 편안하다.






* 장흥 별미 이색 삼합


장흥 바닷가 일대는 갯벌이 차져 맛좋은 키조개와 석화가 나기로 유명하다. 석화는 영화 '축제'의 촬영지인 남포마을이, 여름 산란기를 앞두고 봄철 맛이 절정에 오르는 키조개는 안양 수문바다 것을 최고로 쳐준다.
특히 안양의 키조개는 맛과 크기 면에서 월등해, 전국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라고 한다.

웬만한 조개크기를 넘어서는 큼직한 관자가 맛의 핵심! 회로도 먹고 구워서도 먹으며, 씹을수록 담백하고 달착지근한 맛이 입안에 퍼진다. 봄에 남도에 간다면 반드시 키조개를 맛볼 것을 권한다.

키조개는 한우, 표고버섯과 함께 장흥의 삼합으로 일컬어진다.

이들 재료는 장흥 어디서도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이왕이면 시골장터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장흥읍 탐진강변 토요상설 시장을 추천한다.

장흥표고로 말하자면, '타고 난다'는 말이 똑떨어진다. 유황화합물이 많아 참나무가 잘 생육하는 산림환경에, 연중 12~14℃사이의 덥지도 춥지도 않은 기온, 적절한 습기로 노지재배가 유리한 것이 그 향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날 저녁, 장에서 직접 구매한 표고버섯을 손질하다 무심히 한 조각 베어 물었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릿하게 퍼지는 표고향이 입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귀끝 코끝에서도 느껴지는 듯 했다. 쇠고기와 함께 구우면 고기보다 버섯에 손이 먼저 간다던 지인의 농담이 허언이 아닌 모양이다.


한우고기의 고소함이야 전국 어디를 가든 부족함이 있을까 만은, 남도의 봄 햇살과 함께 해서 그런지, 더욱 맛났다. 토요상설시장에서 한우고기를 구워주는 식당을 쉽게 찾을 수 있다.



* 천관산 숨은 명물, 부평 동백림

 
장흥 또 하나의 명물은 천관산이다. 천관산은 특유의 기암괴석으로 호남의 5대 명산 가운데 하나로 꼽한다. 가을 억새로 특히 유명하나, 봄철 '비밀의 정원'을 간직한걸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천관산 자연휴양림으로 진입하는 10km남짓의 임도를 따라가다 '도대체 이 길이 언제쯤 끝나는 거야'라고 생각할 즈음이면, 길 아래 21만여㎡ 골짜기 가득 동백나무 숲이 펼쳐진다. 번잡한 속세로부터 피난이라도 와 모여 있는 듯 한 동백숲에 왠지 횡재한 기분이 든다. 정자에 올라보니 옹글옹글 모인 나무들의 반짝거리는 머리채가 하도 탐스러워 그 위로 풀썩 쓰러져 보고픈 충동이 인다.
 

상경 길에 강진 백련사도 들러봤으나, 둘의 성격은 확실히 다르다.
유명세를 탄 강진의 동백이 사람 앞에 나서고 싶어하는 느낌이라면 장흥 부평의 동백은 수줍음을 탄다. 휴양림 앞 숲을 거니는 내내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오로지 벌의 웅웅거림과 새 소리, 어쩌다 지나가는 차 소리만을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남도 문림의향 1번지



고고한 멋을 풍기는 동백 때문일까, 천관보살이 산다는 영산 때문일까. 장흥은 걸출한 문인을 여럿 배출한 문림의향의 고장이기도 하다. 영화 ‘밀양’, ‘서편제’의 원작을 집필한 고 이청준을 비롯, 한승원, 송기숙 등 현대 문학을 논하는데 빠질 수 없는 인물들이 장흥 출신이다.


키조개 마을 안양에는 한승원의 집필실 인근으로 약 700m길이의 해변 문학산책로가 조성돼있다. 천관산 아래에는 박범신, 양귀자, 이대흠 등 문인 50여명이 참여한 문학비와 인근 주민들의 사연이 담긴 400여 돌탑길이 인상적인 문학공원이 위치해있다.


이외에도 느리게 사는 것을 모토로 한 슬로우 시티 ‘우산 지렁이 정보화 마을’, 통일신라 때 구산선문 중 하나였던 ‘보림사’, 철쭉 군락지 제암산을 비롯해 잘 가꿔진 편백나무 숲 ‘우드피아’와 ‘귀족호두박물관’ 등 가족과 함께할 여행 거리도 풍부하다.



특히 회진면 일대는 봄철 장흥여행의 백미로 꼽을 만하다.


남해 바다를 끼고 한 그루 목련과 함께 빈 주막이 서 있는 영화 ‘천년학’ 촬영장, 고 이청준 생가가 있는 진목마을까지 이어지는 올망졸망한 마을전경, 낮은 담과 집집마다 한두 마리씩 자리한 소들이 봄볕을 쬐는 표정은 남도에서만 볼 수 있는 서정이지 않던가.


그 아지랑이 낀 풍경이 마냥 따뜻해, 다소 미비한 이정표로 길을 헤매며 자꾸 차를 멈춰야만해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었다. 올 봄의 첫 시작을 소설책 한 권 끼고 정남진에서 헤매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