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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일기/늘푸른지

겨울이 오는 냄새, 경북 청송

by 은지용 2010. 12. 8.




겨울이 오는 냄새는
길가 한 쪽에 쌓인 낙엽더미에서도 난다.

한겨울, 방안으로 막 들어온 누군가의 어깨에 실려오는 찬바람 냄새 같기도 한 그것이 낙엽 사이를 비집고 다니다 코끝에 닿는 모양이다. 기세 등등한 초겨울의 향은 바야흐로 푸른 솔밭의 고장, 경북 청송(靑松)에도 진동하기 시작한다.



 



# 청송 여행의 정석, 주왕산과 솔기온천

경북 청송의 주왕산은 옛날 당나라 주왕이 숨어살았다는 명산이다. 그만큼 산이 깊고 비밀스러운 경치를 간직했다는 얘기인데, 역설적이게도 지금 주왕산은 청송군에서 가장 왕래가 많은 곳이다.

특히 겨울의 문턱에 다가선 이 맘 때에는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주왕산은 등산로 초입 대전사에서부터 보는 이를 압도한다. 산을 지키는 사천왕처럼 버티고 선 기암 때문이다. 대전사 대웅전 뒤로 병풍처럼 펼쳐진 기암의 기백이 당당하다.


기암이 있는 입구부터 물 맑은 계곡 길을 따라 제 1폭포까지 걷는 내내, 명망 높은 바위 거인은 계속 등장한다.

신라시대 사람들이 물을 올려 마셨다는 급수대, 학이 살았다는 학소대 등 높은 바위를 올려다보느라 고개는 계속 하늘을 향한다.

등산로도 평탄한데다, 마침 나뭇가지도 잎을 다 떨궈 시야를 틔워주니, 기암괴석을 둘러보는 것이 만만하다.








발 아래 계곡에는 쨍 하게 맑은 물 위로 늦은 오후 햇볕을 쬐는 빛 바랜 낙엽이 나른하다.


두 폭 정도되는 계곡을 가득 메운 갈색 낙엽무리가 여름 내내 무성했던 초록의 기억을 안은 채 천천히 떠내려간다.

멈춰있는 건가.
겨울이 오긴 오나 보다.


주왕산이 초겨울에 더 좋은 것은 달기약수 인근의 솔기온천 때문이기도 하다. 물 좋기로 소문난 온천은 찬바람 부는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워낙 인기가 많아 주말에는 주차공간이 부족할 지경이다.


바로 옆 주왕산관광호텔에서는 객실에서 온천욕을 즐길 수 있다. 하룻밤 묵으며 산행의 피로를 씻기에 그만이다.



# 새벽, 주산지는 다른 세상으로 통한다


아침 일찍 주산지 가는 첫 차를 탔다.
주산지는 조선시대 만들어진 작은 저수지.
실제 가보면 ‘뭐야 이게 다야’하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작은 규모지만, 물 속에서 솟아난 왕버들 군락이 풍기는 독특한 분위기로 알음알음 유명세를 탄 곳이다.


최근에는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촬영지로 더 알려졌다.

이른 아침인데도 절경을 찍으려는 사진작가들이 눈에 띈다. 사진작가들의 행렬을 따라, 주왕산 기슭을 따라 5분여를 들어가니 물막이를 한 아담한 못이 보인다.



300여살 된 저수지, 주산지다.





왕버들은 고인 물 가장자리를 따라 물 속에 뿌리를 박고 떠 있다. 수면 위로 솟은 왕버들 가지의 굽은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다.


뒤틀리고 기이한 수형에는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비밀이 있진 않을까. 살아있는지. 아니면 고목인지. 구분하기 힘든 형태의 왕버들 군락.

산 속 대부분의 나무들마저 잎을 떨궈낸 터라 어떤 나무가 봄에 잎을 틔울지 도통 모르겠다.


물 속과 물 밖, 이승과 저승의 입구 혹은 출구의 모호한 경계에 서 있는 듯 묘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 사과 인심 후한 농촌마을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 그 새 입구에는 사과 가판대가 차려졌다. 확실히 사람냄새 나는 이승에 돌아온 기분이다.


직접 재배한 농산물을 판매하는 간이 매장에서는 사과가 한 바구니 가득 만원이란다. 시식인심도 후하다.

한 입 맛보니 참 달다. 정석농장에서 나왔다는 아주머니 한 분은 사과 하나를 반 뚝 잘라 보여주더니, 청송사과는 이렇게 가운데 꿀이 들어있다며 사과는 청송이 제일이라 자랑한다.







실제 청송사과는 농식품파워브랜드 대통령상도 수상한 바 있는 명물 중 명물이다. 버스 정류장도, 가로등도 빨간 사과모양을 하고 있어 사과에 대한 청송사람들의 애착을 짐작케 한다.


버스 타고 청송읍으로 가는 길
양 옆으로 사과밭이 지천이다.

막바지 작업이 끝난 나뭇가지는 거의 비었고, 땅심을 돋우기 위한 비료포가 밭 한 쪽에 쌓여있다.

농업이 주요산업이다보니 청송읍은 농촌마을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호젓한 마음으로 읍내를 걷기 시작했다. 조용한 마을에선 느티나무 낙엽이 도로에 앉는 소리도 들릴 정도다.

낮은 담 너머 김장 담그는 아낙들의 수다소리도, 누군가 쭈그리고 앉아 작물을 타작하는 소리도 잘 들린다.

자연스레 남의 집 마당으로 시선이 가고,
모르는 사람의 수다에 미소가 번진다.

초겨울 청송은 그런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