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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일기/늘푸른지

상추곡, 가을색 짙은 정읍에서

by 은지용 2011. 11. 10.

<2011. 11. 전북 정읍 기행>






산과 들에 노을이 들었다.

밤이 오기 직전 화려한 색을 태우는 노을같이, 겨울을 예감하는 가을 들은 온갖 열매와 잎으로 노랗고 붉은 물이 들었다.
전북 정읍은 가을색이 유난히 곱기로 이름난 곳. 붉은 내장산, 구절초 흐드러진 소나무 동산, 황금물결 일렁이는 논 바다, 그리고 명망 높은 선비와 무명 농민의 흔적이 진하게 각인된 곳이다. 전북 정읍은.



*내장사의 아침

우물이 많아 정읍이라 했다 한다.
동진강, 섬진강을 아우르고 있어 그런가, 집집마다 우물을 파면 물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풍부한 물에 김제로 이어지는 평야와, 내장산으로 대표되는 산간지역을 끼고 있어 예부터 식재료가 풍부한 지역이기도 하다.

내장산 아래 오래된 여관에서 운영하는 식당에 들렀다.
소박한 이곳의 추천메뉴는 산채정식. 역시나 소박한 듯 화려한 식재료로 지역 특유의 깊은 맛을 내는 밥상였다.

다양한 찬이 한 상 가득 끝없이 차려진다. 좌청룡 우백호 마냥 각종 산채반찬이 상의 모서리부분부터 채워지기 시작하더니, 더덕구이와 불고기, 된장찌개, 버섯모듬이 상 가운데에 화룡정점을 찍었다.



이 가운데 감 장아찌와 콩나물잡채는 다른 곳에서 맛보지 못한 것이라 주목을 끌었다.
감 장아찌는 향이 강해 취향에 맞지 않았지만, 콩나물잡채는 평범한 콩나물무침처럼 생겼으면서 아삭아삭 새콤달콤하니 아주 색다른 맛이 났다.

동행이 되어준 한 정읍사람은 “손이 많이 가서 어렸을 적 할머니가 특별한 날에 해준 음식이 콩나물잡채”라며 “집에서는 갓씨도 갈아넣어 새콤달콤한 맛이 더했다”고 회상했다.

산채정식의 여운을 안은 채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 일찍 내장산으로 들어갔다.


단풍나무들이 내어준 길을 따라 내장사 입구에 다다랐다. 도로변 나무들은 벌써 겨울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붉으락 푸르락. 말없는 단풍나무는 시월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수놓는 중이다.

내장사까지 뻗어있는 단풍나무 가로수길은 아침의 햇빛과 참 잘 어울린다.
이날도 내장산의 단풍을 보기위해 낮에 수많은 인파가 찾았겠지만, 아침만큼은 고요하고, 고상하다. 이런 길은 천천히 걸어야 제맛이다.

내장산은 다른 산악 국립공원에 비해 일교차와 일조량이 월등하다. 단풍의 종류도 11종으로 매우 다양한 편.  매년 가을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고운 단풍색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장사 주변에는 자연학습관찰로가 조성돼있어, 여유있게 산책하며 한나절을 보내기에 좋다.




# 정읍의 가을, 상춘곡보다 상추곡

정읍에는 이 곳을 배경으로 하는 문학작품이 꽤 전해진다.

구전되는 몇 안되는 백제가요 중 하나인 정읍사는 1000년이 지나서도 지역민들에게 영감을 주는 주요 관광자원 중 하나. ‘달하 높이 곰 돋으샤’라는 옛 우리말의 정취가 물씬 나는 이 노래는 어느 여인네가 배필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염려하는 짧은 노래다.

작자미상의 이 여인은 정읍의 가로등에도 장식돼있고, 지역축제의 주제가 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내장산 망해봉의 능선으로 현현했다 회자되는 등 정읍 사람들의 일상에 살아있다. 화제의 능선은 정읍시 신정동 소재 단풍미인 한우 홍보관 마당에서 뚜렷이 보인다…


양반의 고고한 정취가 느껴지는 ‘상춘곡’도 정읍을 배경으로 한다.

고등학교 때 던가, 문학시간에 배운 기억이 난다. 가사 문학의 효시이고, 본문의 단어가 낯설지만, 봄을 생각한다는 제목만큼은 근사하다는 느낌였다. 상춘곡 지은이 정극인이 태인현에 은거할 때 정읍 칠보의 봄경치를 노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칠보는 양반의 고고한 정취가 묻어나는 호젓한 동네다.

평범한 시골의 소읍같지만 비운의 왕, 단종의 배필였던 정순왕후 유적이 남아있는 지역이자, 신라 말 최치원이 후학양성에 힘쓴 지역이며, 조선조 조정의 피바람을 피해 숨어든 양반의 후손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모여든 사람의 기운 때문일까, 인근 산내면에는 소박한 듯 고고한 향기를 품은 구절초가 유난히 흐드러졌다.

정극인이 다시 태어나 가을철 정읍에 머문다면 은은한 향기 풍기는 하얀 구절초 동산과 집집마다 익어가는 감나무, 황금빛 논을 보며 ‘상추곡’을 새로 쓸 만 하다.



# 무명 농민군의 치열한 흔적

정읍은 그러나 숨은 양반이나 문학작품보다 치열했던 농민의 자취로 더 유명세를 떨친 바 있다. 동학농민운동의 발상지이자 관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얻은 곳이기 때문이다.

처음 농민들이 모여 관아로 쳐들어가기 직전의 말목장터도 현재까지 그 흔적이 남아있고, 큰 승리를 얻은 황토현전적지에는 기념관이 지어졌다.

이날 기념관 주변 바람이 유난히 셌다. 녹두꽃 떨어질라 파랑새보고도 앉지 말라더니 들판에 휘몰아치는 바람에는 괜찮으려나, 새삼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기념관에서 나와 태인, 김제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그야말로 벼 바다다.

100년도 더 전, 비슷한 풍경을 대했을 농민군의 마음 덕분일까, 노랗게 물든 지평선과 그 수확풍경이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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