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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일기/늘푸른지

초여름 괴산, 산 높고 물 높은

by 은지용 2011. 7. 10.

<2011. 7. 충북 괴산>


유월치고 무지막지하게 더웠던 그 날, 볼일을 마치고 한밤중이 돼서야 괴산 길목에 들어섰다.
굽이 굽이 휘어진 길을 따라 고개를 넘었다. 곡선의 정점에서 '느릅재 해발 몇미터'라 적힌 표지판을 봤다.
느티나무의 고장, 충북 괴산에 들어선 것이다.

바람결에 그 흔한 고추냄새가 실리기에는 조금 이른 계절이었지만,
깊은 계곡으로부터 불어오는 초록빛 바람내는 얼핏 맡아본 것도 같다. <편집자주>



# 속세를 떠난 산 속 아홉 골짜기

속리산(俗離山). 속세를 떠난다는 산은 충북 괴산에도 그 한 자락을 내줬다.
그리고 산은 그렇게 청천면 화양동 계곡에 아홉 절경을 흘려놓았다.

일명 '화양구곡'

그 명칭은 사람이 붙인 것이지만 그 모습은 기실 사람의 것이 아니다.


물길 저편에 하늘을 떠받친 듯 서 있는 '경천벽'이 그러하고.
깨끗한 물이 소를 이뤄 구름 그림자가 비치는 '운영담'은 이미 인간사 부대낌을 초월한 듯 맑디 맑다.

콸콸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쉬어감시롱 금빛 모래를 토해내며 속도를 늦추는 '금사담'은
그 너른 바위 어우러진 모습이 인상적이고.
'능운대' 바위는 구름을 찌를 듯 높다.
계곡 옆으로 난 평탄한 길을 따라 읍궁암, 첨성대, 와룡암, 학소대, 파천 등의 명소가 등장하는데
이들 명칭은 이 골짜기를 특히 좋아한 우암 송시열이 붙였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로 좌의정까지 지낸 인물인 그는 '금사담' 골짜기에 '의암재'라는 암자를 짓고, 이 곳에 머물며 수양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


금사담 바위 위에 앉아 의암재를 바라보고 있자니, 정말?  여기서?  공부가 됐을까?  싶다.






의암 선생을 곡해할 뜻은 없다.
그저 범인에게 이 곳은 독서보단 자연을 둘러보며 지인들과 소풍하기 좋은 곳이라서 말이다.


시원하게 흐르는 물 소리, 여기에 보태지는 되는 새 소리 스타카토, 물 속엔 부드러운 모래톱,
상 펼쳐기 딱 좋은 너른 바위, 수려한 초록 잎에 폭 둘러싸인 계곡과 잔잔한 바람.
그냥 그렇게 아무 바위에 앉아 하루 온종일 가만히 있어도 좋을 듯 해서다.


계곡을 찾은 사람들도 쉬 돌아가지 않는다.
물 속에 들어가 올갱이 줍고, 계곡변 매운탕집 평상에 자리잡고 세월아 내월아하며 그저 더위가 가시길 기다린다.

계곡에는 올갱이가 꽤 흔한지 사람들이 숙인 허리를 펴지 못한 채 흐르는 물에서 얼굴을 떼지 못하더라.





# 올갱이, 옥수수, 그리고 고추


올갱이는 물 맑고 산 좋은 괴산의 대표 특산물 중 하나다.

산막이 옛길 앞에는 '둔율 올갱이 마을'이라고 아예 올갱이 이름을 딴 마을도 있다.
올갱이 마을에서는 올갱이 잡기와 감자 쪄먹기, 옥수수 따기 등의 체험이 가능하다는데, 실제 해보진 않았다. 사실 궁금하다.



옥수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괴산 도로변에 참 흔한 게 옥수수다.
드라이브 하다보면, 넓게 심겨진 키 큰 옥수수떼가 바람결 따라 그 이파리 뒤집는 모양새가 꽤 인상적이다.
도로 위에서 내려다보자니, 초록바다의 일렁거림이 연상된다.


괴산에서 옥수수보다 유명세를 타는 작물은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고추다.

전체 면적의 70% 이상이 임야인 괴산에서, 청결고추는 매년 8월 고추를 주제로한 축제를 개최할 정도로 그 위상이 높다.
괴산 읍내에서 목격한 어느 공인중개사무소가 내 건 사무소 이름이 '고추공인중개사무소'였다고 하면 괴산 사람들의 고추사랑이 와 닿을까.



귀한 대접 받는 고추는 이제 막 그 초록이 농염해지기 시작했다.
빨갛게 익으려면 여름 빛을 더 받아야 하지만, 그 빨간 가루는 시장 어느 곳에 가도 흔하게 구할 수 있다.

읍내 어느 방앗간 앞에는 한여름 뙤약볕에 누워 가루가 되어가는 으깨진 고추도 볼 수 있었다.
아쉽게도 그 날, 괴산읍에 위치한 고추유통센타는 문을 닫았다.
유통센타 옥상에 옷섶을 풀어헤친 채 빨간 고추를 들고 '따봉'을 외치는 듯한 임꺽정 캐릭터에 흥미가 일었는데 말이다.





# 산이 물길을 막아서 '산막이' 옛길

아쉬움은 산막이 옛길에서 초여름을 만끽하며 풀었다.

산이 물길을 막았다하여 예부터 '산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데,
길은 아기자기하고 호수는 잔잔하다.

뭐 특별할게 있을까 싶지만, 뱃길, 산책로, 산길 등이 고루 배치돼 걷기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난 곳이다.
길 곳곳에 정말 쉬어가기 좋게 그네모양의 의자나 벤치가 많다.

약수터에는 나무로 깍은 수로와 작은 물레방아를 놓아, 길이 질퍽해지는 것도 막고 눈요기 거리로도 좋게 해놓았다.

관리인이 꽤 꼼꼼한 모양이다.




적당한 곳에 앉아 호수를 바라본다.
미동도 않는 호수가 주는 고요한 무게감이 여름철 특유의 수선함과 오묘하게 어울린다.

호수 위로 배가 한 척 지나간다. 산막이길 입구에서 옛길 산책로가 끝나는 지점을 오가는 배다.

배가 지나가자 과묵한 호수는 말보다 떨림으로 그 느낌을 전한다.
배가 지난 궤적을 되새김질하는 수면.

내 마음은 호수, 그대 노 저어 오오라던 시인은 이 풍경을 봤던걸까.

초여름 파란 하늘이 비친 호수 표면에 그려지는 작은 떨림에 마음이, 조금,
설레였던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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