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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일기/늘푸른지

이천 복숭아 농장의 하루

by 은지용 2011. 10. 18.





복숭아. 예부터 어여쁜 배우자의 상징이자,
신선들의 회동에 빠지지 않는 과실였다.

그 중에서도 황도는 말랑한 과육과 최고의 단맛으로 복숭아철의 대미를 장식한다. 9월이 다 지나가고 마지막 더위가 성질을 부릴 때 즈음, 수확이 한창인 황도를 찾아 경기 이천의 한 농장을 다녀왔다.

미리 말해두는데, 이번 달 여행기는 실상 여행이라기 보다 노동의 기록에 가깝다.


* 토라지고 다치기 쉬운 복숭아

사람의 인연이란 참 묘해서, 어쩌다 경기 이천의 한 작은 복숭아 농장에 연고가 생겼고, 그곳에서 일품을 팔게 됐다.

농사에 신통방통해 보이지 않는 나에게 맡겨진 일은
그저 무게에 따라 선별된 복숭아를 상자에 넣기이다. 그러나 과육이 무르고 쉽게 멍드는 황도를 상자에 넣어 포장하는 것이 말처럼 쉽진 않다.

황도 수확에는 면장갑이 필수다. 조금만 세게 쥐어도 소비자에 이를 때쯤엔 손자국이 남아 멍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선별된 복숭아를 포장상자 한 번에 안착시켜 사람 손을 최소한으로 타야 복숭아의 예쁜 모양새와 색깔이 유지된단다.

과실을 가지에서 따오는 일은, 산 넘어 산이다. 살살 잡아야 하고, 꼭지가 빠져도 안된다. 바구니에 한 가득 빽빽하게 쌓아도 안되고, 복숭아끼리 부딪히지 않도록 간격을 두고 적당히만 담아야 한다.




조심조심 복숭아를 다루다보니, 복숭아가 토라지고 다치기 쉬운 연인을 연상시켜 피식 웃음이 난다. 과육도 연하고 매몰차지 못한 게, 겉모습은 도도해도 마음은 물렁물렁 여린, 그런 연인말이다.

잠시 선별 포장하는 곳에서 나와 농장을 둘러본다.

은은하게 퍼져있는 잘 익은 황도 향이 싱그럽다. 일명 ‘햇사레’ 브랜드로 판매되는 이 곳의 복숭아 품종은 ‘장호원황도’로, 충청 감곡과 이천 일대에서 주로 재배된다.

100여 그루의 나무에 주홍빛이 도는 탐스런 복숭아가 주렁주렁 맺혔다. 곳곳에 자가소비를 위해 조성된 텃밭에는 가지, 깻잎, 고추, 토마토, 아욱, 참외가 아우성이다. 흙냄새와 어우러진 각종 과일, 채소의 향에 기분이 좋아진다.


* 복숭아 나무그늘 아래에서


어느새 식사시간. 큼직한 우산이 걸린 복숭아 나무, 그 그늘 아래 깔아둔 평상에 한 상이 그득하게 차려졌다.

평상으로부터 10걸음 떨어진 밭에서 난 가지무침, 15걸음 떨어진 곳에서 난 깻잎김치와 고추, 12걸음 거리에서 나고 자란 치커리 등이 상에 올랐다. 생산이력이 분명한 싱싱한 야채반찬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삼겹살과 잘 어울린다. 적절한 햇빛, 과수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 한 줌, 그리고 멀리 벼 익어가는 소리. 상에 오른 것만 찬이 아니다. 농장에 흩어져 일하던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왁자지껄 참 맛있게도 먹었다.




휴식은 잠깐이다.

복숭아가 한꺼번에 익어버리는데다, 제 때 따주지 못한 복숭아는 땅에 떨어져버리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는 비가 많아 꼭지가 물러져 낙과가 많다. 떨어진 것 중 상당수는 껍질을 깎아내고 알맞은 크기로 잘라 잼 등의 가공품을 만들지만, 이것은 품이 배로 드는 일이다.


가능한 많은 인력을 동원해서, 빨리, 그러나 조심해서 따는 수 밖에 없다. ‘뚝-뚝-’ 한 해 농사가 맥없이 주저앉는 소리에 힘이 빠지는 건 농장주 부부뿐이 아니다.

농장에 머무는 중에도 수시로 들리는 ‘뚝-뚝-‘ 소리에 수확의 손길은 더 조심스러워지고 조금 빨라진다.


* 그 부부, 그리고 장호원 황도

이 곳 농장은 서울에서 오랜 공무원 생활 후 노후 소일거리 삼아 부부가 운영한다. 복숭아 정식출하가 올해 3번째 뿐이라 사실상 신입농부와 다름없다.


김환백 이영희 부부는 “복숭아 농사가 이렇게 힘든 줄 모르고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초여름에 알이 맺힌 복숭아에 봉지 씌우는 것과 초가을 수확이 가장 큰 일인데, 손이 익지 않은데다 일손 구하기도 어려워 애를 먹는다.

부부는 그러나 “식솔과 지인들이 종종 농장에 놀러와 도와주기도 하고, 이 곳에서 난 맛있는 복숭아와 야채 나눠먹는 재미에 일을 계속하게 된다”며 웃는다.

또 “황도 수확철이 오면 어디어디에 선물할까 하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는 직업농부로선 철없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데, 한편으론 오랜 공직생활 후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설레임이 느껴진다.



꼼꼼하면서도 욕심 없는 부부의 마음 때문인지, 과일 맛이 좋다. 실제 동부과수농협 수매가격을 보면 상위 20%이내에 드는 우등생. 지인을 통해 택배판매 하는 것을 제외하곤 전량 동부과수농협 ‘햇사레’ 브랜드로 출하한다.

이맘때면 황도를 수매, 판매하는 동부과수농협 각 지점에 간이 직판장이 생긴다. 수확철에만 반짝 생기는 간이판매장이라 분위기는 전혀 세련되지 못하지만, 가격과 신선도는 일등감이다. 전화 주문도 가능하다.


물론 이천에 보고 느낄 것이 장호원황도 뿐은 아니다.


요즘 세계도자비엔날레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설봉공원, 도드람산, 도예촌, 농촌체험마을인 부래미 마을과 자채방아마을 등과 이천 곳곳에 흔한 쌀밥집 등이 가을철 나들이 장소로 추천할만하다.


드디어 하루 반나절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얼굴이 따끔따끔하다. 복숭아를 만지다보니 복숭아 털이 얼굴에 붙은 것이다. 다루기 힘든 연인, 복숭아는 마지막까지 고분고분하지 않다. 피식 웃음이 난다.

<2011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