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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읽기/The Giver

냄새가 사라졌다

by 은지용 2022. 3. 28.

2022. 3. 27. 일요일

지난주 일요일 이맘때 희미하게 느꼈다, 냄새가 희미해졌다는 것을. 남편이 라면을 끓이고 있었고, 큰 아이가 멀리서 "라면 냄새다!"라며 환호성을 질렀다. 평소 같으면 내가 먼저 맡았을텐데, 내 감각기관에는 아무런 자극이 없었다. 하루가 지난 후 나는 확진자가 됐다. 요즘 유행하는 감염병 코로나 19에 감염되었다고 확실하게 병원에서 진단받았다.

코로나 19는 나에게 그렇게 아픈 병은 아니었다. 타이레놀 3~4알 정도 먹었고, 평소에도 찾아먹는 오메가3, 강황, 비타민C 외에 다른 약이나 보조제는 필요없었다. 하루이틀 머리가 아팠고, 하루이틀 콧물이 났고, 반나절 정도 코막힘 있었고, 또 다른 반나절엔 가래가 있었던 듯 싶다. 끙끙 몸져 눕는 상황은 없었다. 변덕스러운 감기와 함께 있는 정도였달까. 이 변덕쟁이는 그러나 나에게 매우 확실하고도 기분 나쁜 흔적을 남겼다 ; 후각상실.

오이부추 무침을 먹는데 뭔가 이상했다. 오이의 상큼한 맛은 사라지고 떫은 맛만 남았다. 멸치 국수를 배달해 먹는데 비릿하고 구수한 맛은 전혀 없고, 짠 맛만 났다. 다른 짠 맛은 잘 안느껴졌는데 그것은 화학조미료였을까. 모르겠다. 커피를 마셔도 향이 안난다. A1소스의 맛에도 두 세가지가 빠진 것 같다. 케익을 먹어도 달콤한 감동이 없었다. 첫 맛, 첫 흡입에는 희미하게나마 향이 느겨지는 것 같은데, 두번째부터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싹 사라졌다. 맛은 그저 기억 속에만 남았다.

오늘 자정을 기해 격리는 해제된다. 나는 여전히 냄새없는 세상에 있다. 맛과 향이 사라진 세상에서 기억에 의존하며 나는 '기억전달자 The Giver'를 떠올렸다.

책 '기억전달자'에는 색깔이 없다. 책을 처음 볼 때는 그 사실을 눈치채기 어렵다. 그저 '이토록 평화롭고, 기능적으로 완벽하며, 신중한 공동체라니!'하는 느낌이 주를 이뤘다. 아빠가 보육센터에서 일하고, 엄마는 법원에서 일하는 가족인데, 직업으로 인한 가족문제나 자존심 문제 또는 가사문제가 전혀 없다. 음식은 배달되고, 빈 그릇은 수거되며, 집은 배정받고, 아들 하나 딸 하나 배우자 하나도 배정받는다. 욕심은 차단되고 사람들은 언제나 함께한다. 환경오염도 빈부격차 걱정도 없다. 문제도 없고, 다양함도 없고, 색깔도 없는 곳이다. 그런 것들은 기억전달자나 기억인수자한테만 맡겨뒀다.

음식의 맛과 향이 사라지면서, '맛있다'거나 '신난다'라는 느낌이 유보된 상태. 냄새가 없는 그 상태도 꼭 나쁘지만은 않다. '냄새난다'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만일 이대로 출근한다면, 공장가 특유의 고약하고 불쾌한 냄새는 나지 않을 것이다. 냄새 때문에 머리 아프고 찡그릴 일이 없겠지. 설거지할 때 음식물쓰레기 냄새도 거슬리지 않는다. 씻지 않아도 몸에서 나는 냄새로 불편하지 않다. 고기냄새도 안난다. 유쾌한 맛과 향이 주는 즐거움이 사라지면서, 냄새가 주는 불쾌함도 증발했다.

그리되니, 음식은 맛을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영양과 에너지를 위해 먹는 것 처럼 느껴졌다. 기억전달자 사회처럼 기능만 남은 상태랄까. 희한하게도 맛이 안느껴지니 나는 평소보다 많이 먹을 수 있었다. 꾸역꾸역 먹는게 가능하더라. 케익같은 것들은 먹고 싶은 욕구가 아예 일지 않았다. 최소한의 감각이 인류번영과 생존에 정말 더 도움이 될까? 번영과 생존을 어떤 점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얼핏 그럴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게 영 찝찝하다. 꺼름칙하다. 내가 누리던 특권을 빼앗긴 기분도 들고. 코로나19로 인한 후각상실이 뇌손상과 관련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고 한다. 어떤 뇌손상이 있나 찾아봤더니, 해마와 회백질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감정조절, 기억 등을 담당하는 부분이며 학대받은 아동이나 ADHD에서 쪼그라든 회백질이 관찰된다고 한다. 이런. 나 괜찮은걸까.

나는 내 머릿속 수 많은 지하수 물줄기의 연결이 끊긴 기분이 들었다. 몇몇 다리 교각이 사라진 기분. 음식을 먹고, 책을 볼 때, 음악을 듣고, 풍경을 보고, 어떤 경험을 할 때 기억 속 무엇들과 그 경험이 연결되는 느낌! 또는 하나의 생각이 다른 생각과 연결되며 죽죽 뻗어가는 느낌! 지하수 물줄기가 죽죽 이 갈래에서 저 갈래로 이어지는 느낌! 시냅스 불꽃놀이 느낌! 그 느낌들이 싸그리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끄적임도 조금 다르다. 과거에 단어 몇 개 적어두고 자판 두드리며 써내려간 방법이 현재로선 막연하게 느껴진다. 단어 외에 문장을 더 적어두고 징검다리 두들기며 건너듯 써내려가고 있다. 지극히 '직관적'이었던 머릿속이 '경험적'으로 강제 개편되기라도 한 것일까. 전례없는 감각 상실의 경험에 별별 생각을 다하게 된다. 이 상실감과 적막감 가운데 기억마저 없었다면. 맛과 향에 대한 기억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깜깜했을까.

'기억전달자'에는 색깔 이외에도 하늘에서 내리는 눈, 썰매, 대가족이 함께 모이는 명절 같은 것이 없다. 그와 수반하는 즐거움도 괴로움도 없다. 나아가 역사적 사실과 나의 기원도 차단됐다. 나와 우리가 인식하지 않으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되어있달까.

냄새를 맡지 못하는 사람이 과반수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리고 세대를 거듭하여 그에 대한 기억마저 희미해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사라진 냄새와 사라진 색깔,
맡겨진 기억 사이에서 생각해 본다.
감각을 닫은 채 사는 것.
기억마저 다른 누군가에게 맡겨둔 채 사는 것은.
생각보다 무서울 것 같다.




ps. 후각이 없어진 상실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결책으로 나는 음악을 선택했다. 명상음악같은 요요마의 Silkroad Ensemble 같은 것. 그리고 나에게 가장 화려한 머릿속 불꽃놀이 경험을 준 책 중 하나인 '월든'을 펼쳤다. 불꽃놀이 없이 조용히 '고집불통 이야기'를 보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한 챕터만 봤는데, 여전히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데 안심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 돌아오리라, 우겨본다.
ps. 격리를 통해 나만의 방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느꼈다. 닫힌 문, 프라이버시가 생각보다 너무 좋았다. 아마 크게 아프지 않아서 더 그랬던듯. 조용히 혼자 있는데 설명이 필요없는 상태. 아. 방이 더 많은 집으로 가고 싶다. 그렇다고 가족이 싫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가족은, 안아주고 손잡아주는 스킨십은 꼭 필요한 것 같다.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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