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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일기/이곳에서

크림 브륄레 42

by 은지용 2023. 6. 2.

 
 
 
보통의 일상이었다.
 
어제 출근 후 현재 회사에서 제작중인 물품의 수출일정을 고심했다. 12일 배로 나가는 것이 예정된 순리인데, 좀 더 일찍 5일 배로 나가면 더 좋을 것 같았다. 더 빨리 나가면 이달 안에 돈이 들어올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원료 구매 때 차용한 단기채무 정산과 이런 저런 할 일 처리 및 여타 관계 유지에 도움이 될테니까.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평범하지 않은 상황이 선행되어야만 했다. 우선 5일 출항일이 연휴 등으로 연기되고, 연휴에 누군가 잠깐 출근해서 물건 상차를 할 수 있다면, 등등의 가능성을 따져보다가. 에잇. 그만 하자 싶었다. 예정대로 12일 배로 내보내고 월말에 돈이 들어오길 기대하자하고 마음을 내려놓았다. 그 날 아침 재난문자 해프닝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저 계획들이 너무나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것으로 느껴졌다.  
 
어제 아침 긴급재난문자 알림이 두 번 울렸다.
 
코로나 이후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그렇고 그런 알림인가보다 싶었다. 남편은 평소처럼 일찌감치 집을 나섰고, 아이들도 평소처럼 힘들게 일어나서 겨우 밥을 먹고 등교했다. 하루 전 학교에 싸간 물통을 그 날 아침에도 내놓지 않아서, 물통을 미리 내놓아야 한다고 잔소리 했다. 하교 후 간식으로 사과를 깎아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나도 집을 나섰다. 이불은 여느때처럼 개지 않은 상태였다. 출근을 위해 차에 시동을 켠 후, 핸드폰을 뒤적이다가 그제야 알았다. 오늘 아침 두 번의 알림이 공습 및 대피 경보였다는 것을.
 
나는 서울 인근에 산다. 그러니까 서울에 살지 않는다. 밖에서 사이렌이 울리지 않았고. 안내방송도 없었다. 서울 사는 사람들은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북한에서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것이 감지됐고,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 그랬는지 하필 포털사이트 네이버도 불통이 됐고, 위급재난문자가 각 핸드폰으로 발송됐기 때문이다. 들은 얘기로는, 아이들 데리고 가까운 지하철 역으로 뛰었는데, 사람들이 없어서 대처가 늦었구나 싶었단다. 서울로 출근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하나 싶었고. 집집마다 아이들은 오늘 학교에는 가지 않겠구나 했단다. 지금은 우스갯소리가 되어 다행이다.
 
 

06:41 '위급재난문자: 오늘 6시 32분 서울지역에 경계경보 발령. 국민 여러분께서는 대피할 준비를 하시고,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07:03 '위급재난문자: 06:41 서울특별시에서 발령한 경계경보는 오발령 사항임을 알려드림.'
07:25 '안전안내문자: 북한 미사일 발사로 인해 위급안내문자가 발송되었습니다. 서울시 전지역 경계경보 해제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일상으로 복귀하시기 바랍니다.'

 
 
그 위급 재난문자가 진짜였다면.
 
오발령된 것이 아니라 진짜였다면 어땠을까. 만일 정말 엄청난 핵폭탄 같은 것이 터져서 죽기 직전에 발송된 문자였다면. 그래서 지금 내가 이렇게 한가로이 끄적이고 있을 수 없고. 그 날 점심식사 시간에 오해와 실수로 발령된 긴급문자에 대해 떠들 수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아이에게 내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물통은 그 날 그날 꺼내놓아라'가 되었겠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언급된 인생 42의 깨달음이 죽는 순간 나를 흔들었을 것 같다. (저 책에서 지구는 이야기가 시작하자마자 철거된다. 은하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그리고 최고의 인공지능은 우울증에 걸려있고, 최고의 인공지능은 인생에 대한 궁극적 물음에 대해 오랜 시간 계산 및 숙고 끝에 forty two 라는 아무 숫자를 답안으로 제시한다.)
 
강도를 낮춰서, 핵폭탄은 아니더라도 전쟁이 시작되었다면. 어제 저녁 비빔면에 계란을 넣을 것인가 골뱅이를 넣을 것인가 하는 고민은 바보같은 사치였을 것이다. 주말에 농장에서 상추를 또 가져올텐데 비빔면 말고 더 많이 먹을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할 수 없었음은 말해 무엇하리. 회사의 밀린 결제고 뭐고. 피난 가방을 꾸리고 남쪽으로 정처없이 떠나지 않았을까. 아마 길에서 저녁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아이가 모기 물리면 너무 붓고 가려워하는데 어떡하나. 대출금은 변제되는 것일까 잠시 생각해보고, 주변의 위협과 생존에 정신을 집중했을지도. 쨌든 말도 안되는 꼴을 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고 있을 것이다. <더 로드>의 이름없는 아버지와 아이처럼. 
 
내가 발 디디고 있는 일상이 얼마나 얄팍한 평화에 기대어 있는지 생각하는 하루였다. 내가 하는 수 많은 일상 고민이 얼마나 무의미해질 수 있는지. 인생이 얼마나 허무의 늪 가까이에 지어진 집인지. 크림 브륄레에 덮힌 얆은 설탕막 같은지... 
 
 
 

Unsplash- RAPHAEL MAKSIAN.

 

이 얄팍한 인생 크림 브륄레 이름은 42.
 
 
크림 브륄레는 커스터드 크림 위에 얇고 딱딱한 설탕막을 덮은 디저트다. 정제된 설탕에 열을 가해 얇고 균일한 막을 만드는게 기술이다. 안에 든 커스터드 크림은 거둘 뿐이다. 공들여 설탕을 녹여 얇게 막을 만들고, 그것을 깨뜨려 먹는다. 너무 두꺼우면 깰 때 안의 크림이 튈 수 있고, 너무 물러서 바사삭 소리가 나지 않으면 브륄레가 아니다. 핵심은 무엇보다 달콤해야 하고, 잘 깨져야 한다. 오늘 떠오른 크림 브륄레 42는 안에 든 내용물이 랜덤이다. 커스터드 크림일 수도 있고, 끈적끈적한 고무액일 수도 있다. 혈장헌혈로 모은 하얀 백혈구 일 수도 있을까. 

 
아이들은 그제에 이어 어제도 물통을 내놓지 않았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그 말을 반복했고. 둘째는 '나는 물 안 마셔'라고 어제처럼 말했다. 아마 이 장면은 내일 아침 인생 시나리오에도 쓰여있을 것이다. 별 의미없는 숫자 42 같은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태어난 이상 삶을 임의로 멈추긴 어렵다. 아니 그래선 안 된다. 이왕 살아가는 것, 전쟁 같은 고무액이나 백혈구 보다는 커스터드 크림이 들어있는 크림 브륄레 같았으면 좋겠다. 달콤하고 얄팍한 일상이 깨지더라도, 아이들과 즐겁게 나눠먹을 수 있는 것이 들어있었으면 좋겠다.
 

긴급재난문자나 전쟁은 내일 시나리오에 없었으면 좋겠다. 
 
 
2023. 6. 1 씀.
2023. 6. 2 고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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