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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일기/이곳에서

오미자맛 벼룩시장

by 은지용 2022. 5. 15.



2022. 5. 15 화창한 일요일 낮

어제 동네에서 벼룩시장이 열렸다.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는, 다시쓰기도 하는 시장. 아이들 말로는 사람 100명 이상, 물건 1,000개 이상이 있었다고 한다. 바람 많이 불던 5월의 토요일, 아이들도 나도 난생 처음 벼룩시장에 참여하면서 복잡다단한 감정과 대응의 모습을 봤다. 다섯가지 맛이 난다는 오미자. 오미자차를 마시며 어제의 맛을 회상해본다.


쌉쌀한 맛.
물건이 안 팔릴 때. 시장에 사람들이 많고 왁자지껄하다. 그런데 내 물건 앞은 조용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말이 없다. 여기저기 신나는 목소리가 들리는데 내 물건은 펼쳐진 돗자리에 남겨져있다. 이때 씁쓸했다. 또 마음에 드는 몰랑이 인형이 있었는데, 1,000원이라 살 수도 있었는데, 내가 번 소중한 돈을 아끼느라 사지 않았다. 지금도 꿀벌옷 입은 그 몰랑이가 생각난다. (첫째아이)

달콤한 맛.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찾았을 때. 만두 말랑이를 1000원에 샀다. 보기엔 진짜 왕만두처럼 생겼다. 만지면 기분이 좋다. 말랑말랑 끝간데 없이 늘어나고 감촉이 아주 부들부들 하다. 들고 있으면 정말 맛있는 만두가, 그 맛있음이 가까이 있는 것 같다. (둘째아이)

짭잘한 맛.
이건 쉽다. 나 스스로 돈을 벌어보는 그 기분. 짭잘했고 뿌듯했고, 다음번 벼룩시장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이 날 아이들은 안쓰는 뿅망치, 킥보드, 플라스틱 반지류 등을 처분해서 각각 5,000원과 18,700원을 벌었다. 그리고 각각 2,000원과 2,700원을 썼다. 길에서 20원 주운 것을 쳐줄까 말까.

새콤한 맛.
과연 이 물건이 팔릴까 반신반의하며 나간 자리에서 정말로 그 물건이 팔렸을 때의 기분이 새콤했다. 또 시장에 나온 물건 중에 오토바이가 있었는데, 그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보는 기분도 새콤함에 가까운 것 같다. 오토바이는 위험하고 후지다고 주입받고 있는데, 1,500만원짜리 그 오토바이는 굉장히 멋져보였다. 마냥 달콤한 맛은 아니고 왠지 새콤하면서도 뒷맛이 시큼털털하다. 부모의 시선이 반영된 듯 하다. (첫째아이+엄마)

매운 맛.
동네 벼룩시장이다보니 아이들이 주축이 됐다. 반 친구, 학원 친구 등등 아는 아이들이 많았다. 오후 4시쯤 파장분위기의 시장에서 반 여자애들이 제발 가방 하나 사달라고 부탁해서 너무 곤란했다. 나중에 엄마가 1,000원을 줘서 가방을 사왔다. 그 팀은 그 날 아침부터 나와서 3만원을 벌었다고 한다. (첫째아이)
장 초반에 꽃 모양의 마스킹테이프를 500원에 팔았다. 좀 이따가 다른 곳에서 같은 물건이 1,000원에 되팔리고 있는 것을 봤다. 나도 팝잇과 낚시게임기를 각 500원에 주고 사와서 1,000원에 내놓았는데 끝까지 팔리지 않았다. (둘째아이)

이 날 낮에 남편이 혼자 몇 시간 자리를 지키다가 섭섭함과 피해의식이 쌓였다. 이 날 저녁에 인생전반에 쌓인 섭섭함과 피해의식이 나의 무엇인가와 부딪혔다. 그래, 사회생활에서의 일부터 그간의 이런 저런 일에 대해서도 긴 시간 얘기하게 되었다. 회사 일은 언젠가부터 언급을 일부러 피해오기도 했는데 차제에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아이들 인정해주는 부분까지도.

지금.
도서관 까페 통창 밖
나뭇가지에 햇빛 바람 앉아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본다.
피아노 잔잔한 배경음악에,
오미자차 한 모금 더 마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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