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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읽기/Frankenstein

인생책과 선악과

by 은지용 2023. 12. 18.

 
인생책 3권.
 
메리 쉘리의 <프랑켄슈타인> 속 피조물에게는 그의 인생 방향을 바꾼 책 3권이 있다. Volume 2에 나온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 탄생 직후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빅터에게 말하는 부분이다.
 
그는 아기처럼 호기심이 많았고, 사람의 온기와 먹을 것을 찾았다. 그러나 보는 사람들마다 기절하거나 도망가거나 공격했기에 그 같은 욕구를 충족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는 시골의 어느 오두막집 헛간에 당도했다. 자신의 외모가 문제를 야기한다는 점을 인식하여 그곳 사람들에게 철저히 자신의 모습을 숨기며 기거한다. 마른 잠자리, 약간의 온기, 물과 물을 떠마실 수 있는 컵이면 행복했다.

본디 마음이 선량한 그는 그 오두막집 사람들을 관찰하며 '인, 의, 예, 지'를 갖춰갔다. 그곳에서 1년여의 시간을 보내며 말과 글을 익혔고. 그들의 슬픔을 통해 가난을 본 후 최대한 도움을 주려고 노력도 했다. 나무도 해다 놓고, 그들 음식은 훔쳐먹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길에서 인생책 3권을 우연히 획득한다.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Sorrows of Werter>,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Lives>,
그리고 밀턴의 <실낙원 Paradise Lost>
 

이 책들의 효과를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마음 속에 새로운 심성과 감정들을 끝없이 창출해서 가끔은 황홀할 정도로 마음을 고양시켰지만, 대개의 경우 절망의 나락으로 나를 떨어뜨리기 일쑤였다.

P.171 <프랑켄슈타인> 메리 쉘리, 문학동네

 
이제 더 이상 그는 마른 잠자리, 약간의 온기, 물과 컵으로만 행복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질문이 생겼다. 나는 무엇이었나.
"What was I ?"
 
 



 
가장 강력한 책은 <실낙원>이었다.
 
 

실낙원 삽화. 삽화는 윌리엄 블레이크 작품.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과 이브가 사탄에게 속아 선악과를 먹고, 쫓겨나는 그 이야기. 존 밀턴의 책은 1665년. 출처:위키피디아.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나오는 종교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 성경 창세기편의 판타지 서사시 에디션. 신, 아담과 이브, 타락한 천사인 사탄이 등장한다.

책에서 그는 낯설고 아는 이 하나 없는 곳으로 쫓겨난 아담과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비슷한지를 봤다. 또한 아담의 창조자는 피조물을 완벽한 형태로 만들었고, 그의 행복에 관심이 많다는 점을 봤다.

사탄이 전지전능한 신에 대적하는 부분에서는 경외감을 느꼈다. 동시에 사탄조차 함께 일을 도모하는 동행이 있다는 점에, 아무도 곁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나만 혼자네. 난 뭐지. 세상에서 닦아내야 하는 오점일 뿐인가. 왜 태어났지. 뿅망치 세게 맞았다.


깨달음.
인생책이 주는 깨달음을 그도 맛봤다. 
 

함께 책 읽는 V-club 톡방에서 우리들의 인생책 3권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각자의 인생책으로 꼽힌 것들로 <데미안>, <이방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Q84>, <당신 인생의 이야기> 등이 있었다. 인생 만화책 3권에 대한 이야기도 오갔다. <몬스터>, <칠석의 나라>, <오월의 공원>, <원피스>, <비천무>....

정말 세상에는 놀라운 이야기들이 많다.
 
열거된 인생책들은 머리를 내리치는 책들이다. 거대하고 울림이 큰 범종소리이기도 하다. 마음을 움직이거나 정신 번쩍 들게 하는 말들이 들어있다. 책이 출간되던 1665년에는 깨달음이 불행의 시작, 죄악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보면, 인식의 전환, 은혜에 가까워 보이는데. 

선악과도 그런 맛이었을까. 띠용하는 맛?
 
 
 

Of what a strange nature is knowledge!
It clings to the mind,
when it has once seized on it,
like a lichen on the rock.

P.123 <Frankenstein> Mary Shelly, Penguin
(lichen: 이끼, 지의류)

 
 
 
 
피조물에게는 그 책들이 선악과였다. 3권의 책을 통해 본격적으로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는 <실낙원>을 보며 다음과 같은 의식의 흐름을 겪는다:

자신 역시 아담과 같은 피조물 - 그러나 아담을 창조한 신은 그의 모습을 완벽하게 만들었고 - 자신은 창조자에 의해 흉측하게 만들어졌다 - 신은 메시아를 통한 행복과 구원의 단서를 아담에게 남겨줬다 - 반면 자신을 만든 이로부터 어떤 구원의 단서, 혜택도 받지 못했다 - 신에게도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
 
이후 몇몇 사건을 거치며 완전히 절망하고 분노한 피조물은 그의 창조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본인의 동행을 창조할 것을 요구한다. 동등하게 흉측한 생명체를 하나 더 만들라고. 여자, 이브를 만들어달라고. '나'를 행복하게 하라고.
"Make me happy."
 
 (아담은 이브만 있으면 행복한가?)



 
 
그의 요구는 흐름상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의 존재를 만든 이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하면 합리적이지 않다. 창조자가 져야 하는 책임은 다른 것 같은데. 하나 더 만드는 것보다 지금 존재에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나.
 
앞서 빅터에게 "방탕하게 붙인 존재의 불꽃을 왜 꺼버리지 않았냐" 토로하더니, 아예 스파크를 하나 더 튀기란다. 그 여자 피조물은 뭔 죄람? 그녀 역시 자신의 흉측한 외모를 보고 괴로워할 수 있고, 아름다운 것 좋아하는 남자 피조물 역시 그녀를 못 견뎌 할 수 도 있다. 스스로도 물에 비친 모습 보고 깜짝 놀라고, 노래하다 그 소리가 너무 끔찍해 침묵에 빠졌다며. 왜 거기까지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이 불행하단 사실에만 빠져 허우적댈까. 허우적대는 것은 한 때로 바닥을 치고 다시 일어날까.
 
하긴 그의 창조자 빅터 프랑켄슈타인도 생명을 창조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성공하는 데까지만 헤어릴 수 있었지. 끔찍한 결과물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어쩔 줄 몰라하고 불행해했지. 그렇게 많이 공부해도, 아는 게 많아도, 새롭게 깨달아야 하는 것이 계속 생긴다. .
 
 
앎의 세계는 끝이 없다.
자칫 불행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수 있다.
그들의 인생책이 업데이트 시기를 지나쳤나 보다.

그래서 오늘도 읽고 쓰기는 계속된다.

 

실낙원 삽화. 위키피디아.

 

https://brunch.co.kr/@7bef61f7eaa249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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