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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읽기/1984

BOOK TWO/ 스노우볼챕터

by 은지용 2021. 11. 15.


시간이 정지된 유리 문진. 별 쓸모도 없지만 그냥 예쁜, 투명한 유리 문진 안에서 펼쳐지는 장면으로 윈스턴의 꿈이 묘사됐다. 그의 의식 깊숙한 곳에 꼭꼭 숨겨두었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챕터 7~8페이지는 스노우볼 흔들듯이 자꾸 흔들어서 보고 또 보고 싶은 부분이다. 이것을 잊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컸기에, 길게 읽기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여름밤 소나기가 그친 후 부드러운 빛으로 넘쳐나는 유리 문진 안에서 어린시절 엄마는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 같지만 지극히 인간적인 그 몸짓을 (the gesture) 반복하고 있다.

It was a vast, luminous dream in which his whole life seemed to stretch out before him like a landscape on a summer evening after rain.

It had all occured inside the glass paper weight, but the surface of the glass was the dome of the sky, and inside the dome everything was flooded with clear soft light in which one could see into interminable distances.

The dream had also been comprehended by a gesture of the arm made by his mother, and made again 30 years later by the Jewish woman, trying to shelter the small boy from the bullets, before the helicopters blew them both to pieces. (p.160)

1984는 윈스턴이 금지된 일기를 쓰면서 시작된다. 처음 일기를 쓰게 된 날 뉴스필름에서 본 유태인 여자의 부질없는 몸짓. 윈스턴이 누르고 있던 기억 속 엄마의 몸짓. 앞서 윈스턴 꿈 속에서 'dark hair girl'이 보여줬던 'the gesture'도 떠오르며. 이 책 전반에 걸친 이미지가 '여름밤 소나기 내린 후 풍경처럼' 명징하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초여름의 서늘한 밤이 연상되어 더 좋았다.

집에서 이 부분을 읽고 있는데, 우리집 10살 아이가 다가와 무슨 책인지 궁금해했다. 그래서 주인공 윈스턴 어렸을 때라며 짧게 이야기 해줬다. 전쟁이 나서 먹을게 없어서 너만한 애들이 쓰레기통 뒤지고 감자껍질 건져 먹는 얘기며, 아빠는 정치적인 이유로 사라졌고, 언제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가운데 더 먹기 위해 항상 떼쓸 수 밖에 없었다.
어느날 모처럼 초콜렛을 배급받았는데, 주인공은 여느때처럼 더 먹겠다고 떼쓰고, 여느 때처럼 엄마는 엄마 몫을 떼어서 주인공에게 줬으나, 윈스턴은 동생 몫까지 낚아채서 도망갔고, 그 날 엄마와 동생이 아빠처럼 사라졌다고. 이 부분에서 아이가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며 너무 슬프다고 했다. 나더러 절대 엄마 몫은 자기한테 나눠주지 말고 절대 절대 사라지지도 말라며. 책이 왜 이러냐며.
2차세계대전 쯤 쓰인 책이라, 작가가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라고 언급해주긴 했지만. 사실 나도 아이의 반응이 조금 의외였다. 여기가 그렇게까지 슬픈 부분이었나. 하긴 윈스턴도 눈에 눈물이 맺힌채 꿈에서 깨긴 했다.

사실 어린 윈스턴이 엄마와 동생 몫의 초콜릿까지 다 가지고 fled down the stairs, with the chocolate growing sticky in his hand 할 땐 내 마음이 다 끈적끈적했다.

문득 눈물 방울이 투명한 유리 문진을 닮았단 생각이 들었다.
깨지거나 흩어지기도 쉽고. 아름답지만. 별로 쓸모없어 보이는. 어쩌면 약해 보이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번 챕터 뒤쪽에서 줄리아와 윈스턴은 They can't get inside you 라며 훗날 당에 자백을 하게 되더라도, 마음만 변하지 않으면 배신이 아니라며, only feelings matter라고 말한다. 지나가다 개가 죽은 것을 봐도 마음이 안좋은게 인지상정이란 말도 떠올랐다.

Private이란 말도 귀하게 다가왔다. Privacy에 대한 말을 1984를 읽는 중간에 또 이야기할 기회가 올 것 같다.
스노우볼이 자꾸 연상되는 것은 영화 이퀼리브리엄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interminable 끝없이 계속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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