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엄지작가41

이방인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알베르 까뮈의 소설 에서는 세상 편견 없고 담백한 뫼르소가 이야기를 한다. 저 첫 문장. 양로원에서 살던 엄마의 부고를 전하는 그의 독백은 몇 번을 봐도 군더더기 없이 강렬하다. 장례식을 위해 이틀간의 휴가를 신청하는 자리에서 사장에게 하는 '그건 제 탓이 아닙니다'라는 말까지 어이가 없다. 누군가 이 책을 소개할 때 '사춘기 아이들에게 뿅망치 같은 책'이라고 했다. 동의한다. 내가 처음 이 책을 만난 것도 고등학교 교실 뒤편 학급문고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뭔가 이 세상이 이상하다고 심각하게 느낄 때, '어 맞아' 하이파이브 해 주는 책 같았달까. 뭔가 충격적으로 위로가 되었던 느낌만 남았었다. 미풍양속에 대해 얘기한다면, 은 결코 모범사례로 활용되지.. 2023. 4. 9.
이방인 「밀크 커피를 마셨다」 고소한 라테를 좋아한다. 산미 없이 고소한 커피에 우유를 탄 것을 특히 좋아한다. 고소한 것으로 부족하고 '꼬소꼬소'해야 한다. 따끈한 것도 좋고 얼음소리 나는 차가운 것도 좋다. 시럽을 넣는 것보다는 원두 자체를 달콤하게 블렌딩 한 것을 선호한다. 알베르 까뮈도 라테를 좋아할까. 그의 소설 에서 주인공 뫼르소가 밀크 커피를 좋아했다. 편견도 없고 취향도, 주장도 별로 없는 것 같은 세상 쿨한 남자 뫼르소가 밀크 커피만큼은 확실히 좋아한다고 했다. 뫼르소는 엄마의 부고 전보를 받고 찾아간 양로원에서도 밀크 커피를 마셨다. 관리인은 밤샘 직전에 식사를 권했고, 뫼르소는 거절했다. 그러자 밀크 커피를 권했고, 뫼르소는 수락했다. 밤샘 직후에도 한 잔 마셨다. 그가 그때 그것을 거부했다면. 커피 마신 후 자연.. 2023. 4. 9.
변신 「그것은 사과였다」 카프카 은 색깔로 치자면 대체로 칙칙하다. 대체로 갈색이거나 잿빛인 이야기 속에서 분명한 색감을 주는 것 중 하나가 사과다. 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딱딱한 껍질을 한 벌레가 된 이후 아버지가 그를 향해 물건을 던진 일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레고르가 식구들을 위협한다고 판단하여 공격했다. 식탁 위에 있던 사과를 주머니에 가득 채워갖고 와서. 그때 그 바로 곁에 무엇인가가 가볍게 던져져, 날아와 떨어지더니 그 앞으로 굴러왔다. 그것은 사과였다. 곧 두 번째 사과가 뒤이어 날아왔고, 그레고르는 놀라서 멈춰 섰다. 아버지가 사과로 자기에게 폭탄 세례를 퍼붓기로 결심했으므로 더 달려봐야 소용이 없었다. 카프카 민음사 p.62 아버지가 던진 빨간 사과가 그레고르의 등에 박혔다.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말려서 소동은.. 2023. 3. 23.
변신 「그가 없어져 버려야 한다는 데에 대한 그의 생각은」 나의 변신을 회상한다. 둘째가 아직 유치원에 다닐 때였다. 아이들이 어릴 때에는 2시간 이상 걸리는 미용실 행차도 버거웠다. 긴 시간 비울 수가 없었다. 당시 내 머리카락은 보통 덥수룩하고 매우 길었다. 어느 날 큰 마음먹고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예약해 둔 펌을 했다. 집을 떠난 시간은 대충 2시간. 산뜻하게 머리를 자르고 펌을 한 후 집에 돌아왔다. 달라진 스타일이 살짝 어색하긴 했지만, 가벼워진 머리에 기분이 좋았다. 집에 들어가서 아이들 반응을 마주치기 전까지는. 달라진 내 머리카락을 본 둘째가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엄마가 아니라고. 엄마 돌려달라고. 나는 계속 나인데, 몇 년씩 떠났던 것도 아니고, 단 두 시간이었는데, 머리카락이 짧아졌을 뿐인데, 엄마가 아니란다. 황당하고 불편했다. 내 얼.. 2023. 3. 19.
고리오 영감 「마음을 단번에 비워버리면 파산하고 말아요」 꽤 오래전이다. 20대 시절 경기도 어딘가 목장주들이 모인 자리에 갔었다. 왜 하필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대상이 목장주였을 뿐 그냥 그렇고 그런 일반강좌가 열리던 공간이었다. 어느 단체인지 회사인지 농가 대상으로 교양강의도 하고 상품 홍보도 하는 그런 곳이었던가. 당시 나는 항상 마감에 쫓기며 시간이 부족했는데도, 또 소 한 마리 키우지 않았지만, 그 날 어쩌다가 한가롭게 거기서 그 강의를 듣고 있었다. 강의 요지는 행복한 노후를 위해 자식들한테 집이나 땅을 일찌감치 물려주지 말라는 얘기였다. 그 때 강사가 말하길. 자식과 손자손녀가 놀러올 때 마다 손에 돈을 조금씩 쥐어주면 자주 찾아오겠지만, 한 번에 집을 사준다거나 하면 절대 찾아올 일 없을 것이라고. 자식들 꼴보기 싫으면 한 번에.. 2023. 3. 9.
고리오 영감 「행복은 여자들의 시」 고전 속 여자, 남자, 또는 사람 머리카락이 그 새 많이 자랐다. 겨울을 지내고 봄을 맞는 머리카락은 내 피부만큼이나 푸석푸석하다. 겨울바람이고 봄바람이고 내 몸에서 수분을 가져가는 데에는 전혀 봐주지 않는다. 모근마다 넘쳐나던 힘도 나이가 들면서 자꾸 빠진다. 길어진 머리카락들이 무게를 못 이기고 더 납작하게 엎드리면, 내 얼굴의 생기는 완전히 빠져나간 듯 보인다. 미용실에 갔다. 머리카락에 고집 한 방울 약이라도 쳐주면서 가꿔주려고. 옛날에는 할머니들이 왜 뽀글뽀글 파마를 하는지 이해가 안 됐는데. 마흔이 넘고 보니 그 마음이 너무 잘 이해가 간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들은 힘이 있다. 나이 들었다고 맥없이 쳐져있지 않고, 얇아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는 맨 두피를 가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어릴 .. 2023.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