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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작가42

고리오 영감 「행복은 여자들의 시」 고전 속 여자, 남자, 또는 사람 머리카락이 그 새 많이 자랐다. 겨울을 지내고 봄을 맞는 머리카락은 내 피부만큼이나 푸석푸석하다. 겨울바람이고 봄바람이고 내 몸에서 수분을 가져가는 데에는 전혀 봐주지 않는다. 모근마다 넘쳐나던 힘도 나이가 들면서 자꾸 빠진다. 길어진 머리카락들이 무게를 못 이기고 더 납작하게 엎드리면, 내 얼굴의 생기는 완전히 빠져나간 듯 보인다. 미용실에 갔다. 머리카락에 고집 한 방울 약이라도 쳐주면서 가꿔주려고. 옛날에는 할머니들이 왜 뽀글뽀글 파마를 하는지 이해가 안 됐는데. 마흔이 넘고 보니 그 마음이 너무 잘 이해가 간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들은 힘이 있다. 나이 들었다고 맥없이 쳐져있지 않고, 얇아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는 맨 두피를 가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어릴 .. 2023. 3. 4.
고리오 영감 「자, 다들 식사하세요. 수프가 식겠어요」 https://brunch.co.kr/@7bef61f7eaa2497/19 자, 다들 식사하세요. 삶은 부엌, 또는 식사와 식사 사이에 산다 | 끼니를 챙겨먹고 나와 드라마 같았던 책 에 대해 끄적인다. 책을 처음 펼친 것은 어느 화요일 저녁, 식전이었다. 이 책 사 brunch.co.kr 아침을 먹고 나와 드라마 같았던 책 에 대해 끄적인다. 책을 처음 펼친 것은 어느 화요일 저녁, 식전이었다. 이 책 사이사이에는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상, 밥이 있었다. 에서 하숙집 보케 부인도 말했다. 고리오 씨가 비참하게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직후에. 자, 다들 식사하세요. 수프가 식겠어요. 삶은 식사와 식사 사이에 있다. 그 사이마다 감정들이 펼쳐지는 이야기, 연극, 가끔 시詩가 되기도 하는, 그것이 인생이다... 2023. 2. 26.
지킬앤 하이드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상황」 -지킬 박사가 어스시의 게드였다면- 이름이 아주 중요한 세상이 있다. 어슐러 K. 르 귄의 소설 의 세상이다. 지킬과 하이드 얘기의 배경이 되는 1800년대 후반 영국 런던과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사실 이 책을 보는 내내 어스시의 마법사 첫 번째 이야기가 떠올랐다. 타고난 자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다가 그림자를 문 밖에 풀어놓게 되고, 그 공포스러운 그림자의 정체를 풀어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랬던 것 같다. 어스시 Earthsea 세계에서는 사물의 진짜 이름을 아는 것이 마법의 시작이다. 그 세상에서 이름은 누군가 흔히 불러주는 수단 그 이상의 뜻이 있다. 이름은 그 존재의 속성이다. 어스시에서 사물의 이름은 꿰뚫어보는 자만이 알 수 있도록 감춰져 있고, 진짜 신뢰하는 친구끼리만 자신의 이름을 공유한.. 2023. 2. 17.
지킬앤 하이드 「하이드 씨를 잘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https://brunch.co.kr/@7bef61f7eaa2497/14 하이드 씨를 잘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도서관 책에 낙서하는 하이드 씨 | 엄지작가 1기 멤버들과 지난달 말쯤 만났다. 지난 한 달간 몇 꼭지 끄적거리고 나눈 뒤라 더 할 얘기가 많았고, 책 이야기로 이렇게나 즐겁게 brunch.co.kr 엄지작가 1기 멤버들과 지난달 말쯤 만났다. 지난 한 달간 몇 꼭지 끄적거리고 나눈 뒤라 더 할 얘기가 많았고, 책 이야기로 이렇게나 즐겁게 떠들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좋았다. 2월에는 와 을 읽고 쓰기로 했다. 지난번 수다 때 번역본 마다 뉘앙스 차이가 있다는 점으로도 신나게 떠들었기에, 이번에는 여러 여러 번역본을 빌려서 보고 싶어졌다. 민음사 번역본과 옥스포드 출판사의 영어 원서가 집에 .. 2023. 2. 12.
데미안 「그것은 아버지의 신성함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다」 각성의 발견 https://brunch.co.kr/@7bef61f7eaa2497/13 그것은 아버지의 신성함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다 각성의 발견 | 친구들은 말한다. 은 어렸을 때 훨씬 좋았다고. 그들이 말하는 어렸을 때란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던 10대를 이른다. 보통 사춘기라고 부르는 그 시즌이다. 도대 brunch.co.kr 친구들은 말한다. 은 어렸을 때 훨씬 좋았다고. 그들이 말하는 어렸을 때란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던 10대를 이른다. 보통 사춘기라고 부르는 그 시즌이다. 도대체 이 책의 무엇이 그 때의 우리와 만났기에 참 좋았을까. 나는 십대 때 이 책을 보지 않았다. 몇 안되는 내 친구들은 책을 좋아했고 데미안에 열광했다. 주변에서 좋아하기에 나도 당연히 본 줄 착각했다. 마흔 넘어 북클.. 2023. 1. 30.
데미안 「나무가 죽은 것은 아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유년은 나의 주변에서 폐허가 되었다. 부모님은 어느 정도 당황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누이들은 아주 낯설어졌다. 각성이 나의 익숙한 느낌들과 기쁨들을 일그러뜨리고 퇴색시켰다. 정원은 향기가 없었고 숲은 마음을 끌지 못했다. 내 주위에서 세계는 낡은 물건들의 떨이판매처럼 서 있었다....(중략)… 그렇게 어느 가을 나무 주위로 낙엽이 떨어진다. 나무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비, 태양 혹은 서리가 나무를 타고 흘러내린다. 그리고 나무 속에서는 생명이 천천히 가장 좁은 곳, 가장 내면으로 되들어간다. 나무가 죽은 것은 아니다. 기다리는 것이다. p.90 민음사 헤르만 헤세가 쓴 에서 주인공 싱클레어의 본격 사춘기를 여는 글이다. 사실은 두 번째 챕터 ‘.. 2023. 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