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피상적 개별자의 철학 산책/서양철학사 : 군나르 시르베크 & 닐스 길리에

2-1. 소피스트들 (3) 프로타고라스

by 은지용 2025. 4. 20.

프로타고라스 Protagoras (기원전 약 481~411)
 
트라키아 압데라 출신, 데모크리토스와 동향인가 봅니다. 그리스 여러 도시 특히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들에서 유명한 교사였다고 해요. 활동반경이 꽤 넓어 보입니다. 플라톤은 그의 대화편 <프로타고라스>를 썼고, 프로타고라스의 저서로 <신들에 대하여>, <진리 혹은 박살 내는 논변들> 등 여러 편이 있습니다.
 

https://namu.wiki/w/%ED%8A%B8%EB%9D%BC%ED%82%A4%EC%95%84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 말은 사물이 인간에게 어떻게 인식되는가와 관련한 '인식론적 명제'로도,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규범적 명제'로도 접근할 수 있습니다. 
 
피상적 개별자이자 문화인류학에 관심이 많았던 저는, 저 말을 보자마자 규범적 명제로 생각했습니다. 옳다는 것의 의미가 사회 집단에 따라 달라지고 (어디선 유일신이 선이고, 어디선 개인의 내면 속 깨달음이 선이며, 또 어디선 제사를 모시거나 자산을 불태우는 게 선이기도 하듯), 각 사회문화의 양상-옳고 그름, 바람직함과 금기 등을 포함-을 연구하는 게 (한 때의) 문화인류학이잖아요. (지금 문화인류학은 뭔가 힙하게 달라진 것 같긴 한데 오히려 무슨 학문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책에서 인식론적 명제부터 꺼낼 때 집중이 잘 안됐던 것 같아요. (게다가 철학책답게 딱 답을 제시하는게 아니라 이렇게 저렇게 논의를 발전시켜 가며 이동하는데, 좀 어지러웠습니다) 제가 이해한 맥락대로 규범적 명제부터 정리해봅니다.
 
 
 
책에서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를 규범적 명제로 이렇게 말해요 :
 
현상의 가치나 중요성이 이런 혹은 저런 의미에서 인간에 대해 상대적인 한에서 인간은 만물의 척도인 것이다. 사물들이 그 자체로는 선하거나 악하지 않고, 오로지 한 인간이나 한 인간 집단과의 관계 안에서만 선하고 악하다. 규범적 문제와 관련한 최종심은 사회라는 것을 함의한다. 페르시아와 아테네의 규범이 다르듯. 일련의 규범과 가치가 그것들이 성립하여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는 절대 유효하지만, 다른 사회에서는 다른 가치와 규범이 유효하다. 상대주의적이기도 하고 절대주의적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법에 대한 두 가지 근본적 견해를 마주합니다. 타당한 법이란 주어진 시점에 현존하는 법, 즉 '실정'법이라는 견해. 그리고 타당한 법은 현존하는 법과는 다르며, 자연적으로 주어진 법의 이념에 호소한다는 주장입니다. 오늘날의 법실증주의와 자연권철학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핵심 물음은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든 보편적 규범에 접근 가능한가', '전통과 전승을 넘어서서 보편적으로 옳고 참인 것을 인식할 수 있는가'입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특정한 자연법 개념을 가지고 소피스트들 사이에 나타난 실증주의적 경향에 반론을 제기하며, 이어서 알아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규범적 명제를 뒤쪽에 풀었나 봅니다.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화두로 삼고 있는 정의란 무엇인가도 이 맥락이겠죠 아마도?
 
 
다시 앞으로 돌아가요.
인식론적 명제로서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란? 
 
사물들은 존재하는 방식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 사물이 어느 시점에 인간에게 현현하는 것은 언제나 사물들의 일정한 측면이나 특성이다 ->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목수의 손에 들린 망치는 못을 박는 도구, 망치는 다루기가 쉽거나 어렵고 가볍거나 무겁다.
물리학자에게 망치는 일정한 분자구조를 가지고 있고 무게 탄성 등과 같은 특성을 지닌 물리적 대상이다.
상인에게 망치는 특정 가격과 이윤이 있는 생산품, 판매와 보관이 용이하거나 어려운 생산품이다.
사물이 일정 시점에 한 사람이 처한 상황이나 의무에 의해 규정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남
 
-> 인간은 만물의 척도
-> 인식론적 관점주의 Perpectivism를 함축
-> 사물을 바라보는 다수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인식론적 다원주의를 함축
->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우리 활동이나 상황에 의해 규정됨. 상대주의.
 
여기서 든 뻘 생각. 나는 존재하는 방식 그 자체로 타인에게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 나는 때에 따라 대상에 따라 일정한 측면이나 특성을 보여준다/ 상대가 나의 일정 측면이나 특성을 인식한다 -> 타인은 나의 척도?... 그런데 내가 존재하는 방식 그 자체는 어떤 모습인가? 인지할 수가 없네. 역시 타인은 내 세계의 부품인가. 아니 내가 타인의 세계의 부품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는 건가요? 아니요 할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이 이 상황에서 현현하는 방식 그대로인 한, 일정한 관점하에서만 이뤄진다면, 우리는 참되게 진술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목수끼리는 어떤 망치가 특정 과업에 가장 잘 맞는지 찾아낼 수 있고, 과학자 역시 어떤 대상의 특정 중량, 탄성 등에 대해 쉽게 합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이때 대상은 상상한 것이 아니라 망치, 물체와 같은 객관적 대상입니다. 
 
관점이 변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에도 우리의 진술 대상이 동일한 대상, 즉 그 망치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네 그렇긴 합니다. 관점들 간에는 중첩과  유동적 변환이 존재하거든요. 목수는 단지 목수일뿐 아니라 아버지, 아들, 형과 같은 가족 관계 속에 있고, 또한 건축자재 공급상이나 고객들과의 관계처럼 상거래 속에도 있습니다.
 
 
---
그런데... 이 진술도 일정한 관점에 종속되어 있는 진리일까요? 이 진술을 상대적으로 생각하면 진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진리가 아닐 수 있다고 하면 회의론에 가까워지고. 진리임에 틀림없다고 하면 관점주의를 부인하게 됩니다. '회의적인 자기 해체의 위험'. 발 밑이 별로 단단하지 않네요... 책에서는 프로타고라스가 관점주의를 사물에 대한 지식을 넘어서 이론적 토론에까지 확장하고자 했다 싶다네요. 무슨 이론적 토론? 책이 돌고 돌아 머리가 아플 지경입니다.
 
---
 
바라보는 대상을 객관적 대상 혹은 현현하는 사물에서 더 확장해 봅니다.
이를테면 신이나 어떤 주장으로요.
 
이 경우에도 관점이 변해도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을까요?
 
프로타고라스는 "모든 주제에 대해서 두 가지 상반되는 주장이 존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참인지 아닌지 판정해 보려고 하지도 않고서 서로 의견을 달리한다는 사실을 뜻하는 걸까요? 동일한 사안에 대해 똑같이 참이면서 서로 모순되는 두 개의 진술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걸까요? 후자라면 '회의적인 자기 해체의 위험'이 감지됩니다. 철학적으로 문제가 된대요. 아마도 논의가 진행될 수 없어서? 더욱이 관점이 사회적 신분이나 경제적 상황에 따라 규정되고, 당시 그리스나 지금 우리 사회나 계층 간 이동이 어렵다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상이한 계급, 상이한 민족, 상이한 직업집단, 상이한 연령집단 간 의사소통은 근본적으로 어렵지 않을까요? 
 
책은 여기서 출발점을 다시 잡아줍니다. 집단 말고, 자신의 경험과 상황을 토대로 사물을 자신의 이미지 속에 '각인하는' 개개의 인간을 출발점으로 삼아보자고. 심리적인 명제가 될 수도 있다고. 그리고 다시 규범적인 명제로 우리를 이끕니다 :
 
현상의 가치나 중요성이 이런 혹은 저런 의미에서 인간에 대해 상대적인 한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사물들이 그 자체로는 선하거나 악하지 않고, 오로지 인간이나 한 인간집단과의 관계 안에서만 선하거나 악하다고 말할 수 있다.
 
프로타고라스는 "신들에 대해 나는 그들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혹은 그들의 모습이 어떤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지각 불가능성과 인생의 짧음처럼 확실한 지식을 방해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
 
이는 신적인 것은 지각을 넘어선다는 것, 이것은 지각이 인간 경험에 하나의 근본 토대 혹은 절대적인 근본 토대라는 것을 함의합니다. 만약 인생이 더 길다면 우리는 신적인 것을 더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함의도 있습니다. 신적인 것이 존재한다, 인생이 길어지면 어떤 방식으로든 신적인 것에 대한 지식이 늘어날 것을 인정하고 있는 거죠. 인간의 인식능력 자체는 문제 삼고 있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소피스트인 듯 소피스트 아닌 모습을 보여줍니다. 소피스트는 저에게 어쩐지 철저한 회의론자 느낌이었거든요. 돈 버는 회의론자요. 다음 주에는 소크라테스를 보게 됩니다. 나름 유명인사라 기대됩니다.
 
600BC. 자연철학시기 (탈레스~). 외적인 것(자연). 주장적
450BC. 인간중심시기 (소피스트들). 내적인 것(인식,윤리). 회의적
400BC. 체계의 시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균형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