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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상적 개별자의 철학 산책/서양철학사 : 군나르 시르베크 & 닐스 길리에

2-2. 소크라테스

by 은지용 2025. 4. 26.

 


소크라테스 Socrates (기원전 약 470년~399년)
 
그가 활발하게 활동한 시기는 소피스트들과 같은 시대, 기원전 450~400년, 인간중심적 시기입니다. 최초의 아테네 철학자로, 귀족은 아니었고 석공 아버지와 산파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인 크산티페와의 사이에 세 명의 자녀를 뒀대요. 플라톤의 저작 대화편들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서구 정신에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영감을 불어넣는 사람이 됐다죠.
 
윤리적 태도와 정의롭고 욕심 없는 삶, 번뜩이는 재치, 그리고 정직함과 유머는 그의 특출한 장점입니다. 날카로운 질문도 그의 특출한 점 중 하나.

이 질문에 사람들이 불편해했고, 아테네 권력층은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젊은이들을 타락시킴으로써 사회에 위험이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독배형에 처해졌죠.
 
인간중심 시기, 자연철학보다는 인식론에 주목합니다. 대화를 통해 개념을 명료화하고 정의 내리는 것 + 윤리 정치적 문제들에 주로 관심을 가졌습니다. 특히 윤리 정치적 문제와 관련해서는 소피스트들의 회의주의를 반박하여 보편적으로 좋고 옳은 가치와 규범이 존재한다는 점을 피력했습니다.
 
* 소크라테스 윤리학의 기본 원리 :

덕과 앎은 하나다. -> 무엇이 옳은지 참으로 아는 사람은 또한 옳은 것을 행할 것이다. -> 이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덕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아레테Arete.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착한 일을 하는 '덕'을 넘어섭니다. 아레테의 본질적 의미는 도덕적 뛰어남을 포함하여 어떤 사람에게 주어진 기능이나 역할을 최상의 방식으로 수행함으로써 성취되는 뛰어남, 즉 뛰어남이란 개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덕이란 사회 속의 인간으로서 자신이 가진 진정한 잠재력을 성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p.75) 아레테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기능을 적절한 방식으로 수행한다. 선생은 자신의 학생들을 적절하게 가르칠 때 아레테를 갖는다. 대장장이는 좋은 연장을 만들 때 아레테를 갖는다. 사람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성취할 때, 즉 인간 존재가 의미하는 바의 모든 진정한 잠재력을 실현할 때 덕이 있다.
 
덕은 에피스테메, 즉 앎과 같습니다. 이 앎 역시 덕처럼 보통의 앎을 넘어섭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앎을 포함하되, 이 앎은 경험이 쌓이는 것이 아니라 주로 개념적 분석을 통한 것이며. 개념적 분석을 통해 정의, 용기, 덕, 좋은 삶, 규범처럼 우리가 인간과 사회에 대해 갖고 있는 모호한 개념들을 명료하게 함으로써 추구되는 앎입니다. 그리고 그 앎이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의미 없다는 걸로 들리는데요?
 

* 앎의 종류/ 단계:

1. 있는[~인] 것 what is에 대한 사실적 지식
2.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 what should be에 대한 규범적 통찰 : 소피스트들에 대한 답변 : 보편적으로 좋은 것이 존재한다
3. 그 사람이 진정으로 책임을 지는 통찰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오직 이성의 도움만으로, 즉 개념의 명료화를 통해 좋은 것(덕)이 무엇인지에 대한 완전한 통찰을 획득할 수 있었다고 믿었는지는 명백하지 않다 : 이성만으로 통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종종 내면의 목소리, Daimon 다이몬에 대해 언급했다. 
 
다이몬은 자연과 인간사에 개입하는 비인격적인 신적 힘 divine power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명칭입니다. 궁극적으로 소크라테스가 윤리학을 이성만이 아니라 직관적 통찰력에도 근거 지으려 시도한 것 같긴 하지만서도. 정작 소크라테스 자신은, 자신의 양심에 따랐다고 말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 양심의 목소리가 보편적 도덕성에 접근하게 해주는가/ 그의 경우 그러했는가는 여전히 해명되지 않은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 소크라테스의 철학사적 의의 :
* 도덕성에 일정한 인식론적 토대를 제공.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들이 자신들의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들의 행위와 말을 이끈 근본적인 견해에 대해 성찰하게끔 만들고자 노력했습니다. 일깨우려고 노력한 셈이죠. 이것은 세 번째 앎과 관련됩니다. 
 
도발적인 산파술에 의한 대화의 목적 : 각자가 대화를 통해 스스로 문제의 본질을 깨닫는 것. 어떤 관점이 올바르다는 것을 깨닫고 그 관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소피스트들처럼 우리 마음을 미리 정하고 토론에 임해서는 안되고, 더욱이 상대를 이기기 위해 논쟁을 이용해서도 안됨. 토론에서는 각자 사안 자체에 대해 더 많이 배우려고 노력해야 함. 각자의 관점은 자신이 어느 때든지 참이라고 인식하는 것과 합치해야 함. -> 나쁜 확신은 근거를 이해하지 못한 채 무언가를 믿도록 설득당한 상태, 좋은 확신은 결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을 이해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참이고 옳다고 확신하는 것. 좋은 확신(이성에 의한 확신 by convincing)과 나쁜 확신(수사에 의한 설득 by persuading)은 구분됨.  대화에 임하는 사람들의 열린 마음과 양심적 태도를 전제하고 있네요. 소크라테스 얘기를 들으면 항상 드는 의문이 있죠. 정말 사람들이 이렇게 훌륭해?
 

(p.81) 대화 참여자들이 합리적이고 동등한 상황이 아닐 경우, 예를 들어 토론자들이 배운 바가 짧아 지적인 한계를 가질 경우 혹은 위신과 물질적 이익이 걸려 있을 경우 자유로운 토론은 매우 어려울 수 있다.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이런 논의상황은 매우 자주 발생한다. 이런 경우 문제는 어떻게 자유롭고 합리적인 토론의 조건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한해서,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만, 수사에 의한 설득을 했다고 합니다... 전해지는 대화록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토론을 통해 대화 상대들의 모순점과 관념의 모호성을 지적함으로써 그들의 실재관을 해체했습니다. 그는 그의 대화 상대들의 사회적, 도덕적 개념들이 견지가 불가능하거나 불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죠. 그렇게 이론적 탐구의 필요성을 일깨워줬습니다만. 일부(?) 사람들은 그의 이런 모든 시도에 대해 경멸적 반응을 보였지요. 아마도 불편해서. 지배자들은 익숙한 의견의 해체가 나라에 위험요인이 된다고 생각했겠죠.

소크라테스는 실제로 대화형식과 수사학적 수단을 사용하여 대화 참여자들 사이에서 자유롭고 변증법적인 사유 과정이 발전되어 나올 수 있는 공동의 준거 틀을 위한 토대를 놓으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플라톤이 직접 논점은 다루는 논문 형식의 글이 아니라 장면 묘사가 담긴 대화편을 썼다는사실은 이러한 방향의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대화형식이 독자와 저자에게 공동의 토대를 쉽게 만들어내게 해 주니까요, 산문형식 보다요. 
 
 
소크라테스 윤리의 기본으로 돌아갑니다.
 
1. 덕과 앎은 하나다. ->
2. 무엇이 옳은지 참으로 아는 사람은 또한 옳은 것을 행할 것이다. ->
3. 이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1. 소크라테스는 이성이 좋은 것을 먼저 인식하는 한 이성이 의지/감정에 우선한다고 믿으며, 의지/감정은 이성이 가리키는 바를 성취해야 한다고 믿는다. 합리주의자. 반대로 주의주의 voluntarism는 의지/감정이 이성보다 우선한다는 입장으로서  우리가 먼저 (좋은 것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을 의욕하고, 그다음에 이성이 이것을 실현할 수단을 (합리화를) 찾는다고 주장한다. p.83 각주
 

2. 어떤 사람이 좋은 것을 인식하고서도 그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그 말의 정의에 어긋나기에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있지 않은 것과 제논의 말로만 가능한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경주의 스멜이 납니다... 당신이 먼저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좋은 것에 대한 올바른 통찰과 더불어 좋은 것에 대한 본인 자신의 직접적인 통찰을 획득했다면, 다음데 당신이 올바로 행동하는 것이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 보다 정확히 말해 당신이 올바로 행동하는 것이, 그 지식이 진정 본인 자신에 의해 직접 획득되었다는 것에 대한 증거.
 

3. 올바른 행위는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데, 소크라테스는 사형에 처해짐.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행복 Eudaimonia란 말은 명백히  욕망이 아닌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신체적 고통은 행복의 장애물이 아니었음. 그에게 행복은 자기 자신과 평화로운 상태에 있는 것, 즉 양심과 자존심을 갖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행복은 인간적 완결성 및 정체성과 관련이 있기에, 한 인격체로서 뛰어난 사람은, 그래서 완전한 사람은, 그래서 덕이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입이 떡 벌어집니다. 과도한 경쟁과 성취에 대한 욕망의 땅, 그래서 헬조선이라고도 불리는 곳에서 소크라테스의 덕과 행복이 주는 울림이 있네요. 그 성취가 그 성취가 아닌거겠죠?! 음.. 나쁜 확신을 이끌어내는 유튜브의 조회수와 구독자수가 높은 세상에서 소크라테스가 견딜 수 있었을까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선구자 소크라테스 :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해 우리에게 질문을 제기하는 능력을 키워주려고 시도합니다. 우리는 오류를 범할 수 있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후대 철학체계에서 이러한 통찰은 독타 이그노란티아 Docta Ignorantia 즉 박학한 무지라고 불립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 때 새롭고 보다 나은 답변일 수 있는 다른 이들의 주장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열린 대화, 자기비판적 대화로 철학을 개념화하는 데 있어서도 소크라테스가 선구자 역할을 했습니다. (p.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