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파정 서울미술관 10주년 기념전시에 다녀왔다.
아주 좋았다.
전시제목은 "두려움일까 사랑일까"인데, 사실상 한국 근현대회화 베스트 오브 베스트전시회 같았다. 김환기, 유영국, 김창렬, 김기창, 이중섭, 박수근, 천경자, 이우환, 이왈종, 한묵 등등. 미술에 관심이 조금 있는 사람이라면, 화가 이름은 몰라도 그림만 보고도 "아! 이 그림~" 할만한 것들이 한 자리에 모여있다.
미술관은 인왕산과 북악산 산골짜기에 숨어있는 서울 아닌 서울, 부암동에 있다. 경복궁과 청와대 서쪽 뒤편의 그 곳.
동네는 참 비사교적인데 전시회는 참 사근사근하더라.
그림 옆에는 으례 그렇듯 작가 이름과 작품 완성연도, 작품설명 몇 줄 정도가 적혀있기 마련이다. 이번 전시에는 그 옆에 명패가 한 두가지씩 더 있었다. 작품의 뒷면 사진과 이 그림의 주인의 한 마디, '수집가의 문장'이 있었다.
수집가의 문장 덕에 전시회 자체가 그의 수필을 한 편 읽고, 아니 오감으로 체험하고 나온 듯한 느낌을 줬다.
이중섭 <황소> 와 <길 떠나는 가족> 수집가의 문장;
1983년 9월, 태풍 포레스트가 많은 비를 뿌리던 날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명동 성모병원에서 일을 마치고 비를 피하기 위해 어느 액자 가게의 처마 밑으로 피했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이 작품이 걸려있었습니다.
'잘 못 그렸다.'
그림을 보고 들었던 첫 생각입니다. 지금 와서 고백하자면 처음 봤을 때는 그 집 아이가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인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그림이 아니고 사진이라는 얘기를 듣고 값을 흥정해 7,000원을 주고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사진을 계속 보고 있으니 처음으로 원화가 갖고 싶어지더군요. 그러나 진품이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었고, 또 그 값이 저의 월급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2010년 6월 29일, 이중섭의 <황소>가 미술시장에 나타났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진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큰 기와집 한 채 값이었던 작품이 이제는 빌딩 한 채 값이 되어 있었고, 아무리 미술품이 좋아도 수집가로서 현실적인 상황과 조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원했던 작품을 드디어 품에 안을 기회가 온 만큼 고민을 거듭한 끝에, 당시 아끼던 소장품인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을 되팔고 나머지 금액만 지급하는 방식으로 거래했습니다.
30년 전 처음 사진으로 <황소>를 만나고 30년 뒤 진품 <황소>를 소장하는 과정을 되돌아보면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았던 이중섭과 깊은 친분을 쌓은 기분이 듭니다. 얼마나 드라마틱한 인연인지요.
유영국 그림 옆에 있던 수집가의 문장;
유영국화백은 고향의 울진에 있던 산을 그렸는데, 산이 많은 산정동에서 나고 자란 저에게 이 작품들은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입니다. 한편으로는 '장롱 컬렉터'로서의 삶을 반성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던 작품들이기도 하지요.
처음 유영국 화백의 작품을 수집하고서는 혼자 보는 것만으로도 풍족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작품을 전시장에 걸어 놓고 보니 내가 이런 작품도 소장하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더군요. 많은 사람과 작품을 나눌 때 눈앞의 산이 내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며, 새로운 산으로 다가온다는 깨달음을 안겨준 순간이었습니다.
임직순 그림 옆에 있던 수집가의 문장;
임직순 화백의 작품은 화폭을 채운 색 하나하나가 정말 아름답습니다. 강렬한 원색들이 오묘하게 섞이며 조화를 이루고 있죠. <소녀>는 미술 경매에서 유찰이 된 작품인데, 제게는 해외의 명화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엄청난 힘이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중략 ...
마음을 흔드는 그림 한 점을 온전히 가지는 것이 그 어떤 금전적 이득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숱한 그림들이 증명해주었기 때문이지요.
수집가의 문장이 그림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매우 효과적으로 해주고 있었다. 나는 지금 확실히 스토리텔링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다. 관람객에게 확 다가가는 전시. 사진촬영도 자유로웠다. 인스타용으로도 활용 가능한 요즘 감성이 충만한 전시같았다.
이중섭 그림 옆에는 그가 가족들에게 쓴 편지 영상이 있었다. A4용지를 편지지처럼 활용하는 그의 디자인 감각과 아이들 뿐 아니라 엄마 아빠도 벗은 몸으로 그릴 수 있는 솔직함, 종이가 한 장 밖에 없는 경우가 많은 그의 가난한 시절이 느껴졌다. 그리고 영상 마지막에는 이중섭의 부인이 나이가 들어 휠체어에 앉아 그의 그림을 보는 사진이 있었다.
우리가 오늘 전시에서 본 그 <황소>를 그녀도 보고 있었다!
미술관 큐레이터님, 훌륭한 스토리텔러십니다.
뭐니뭐니해도 나에게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김기창과 김환기였다.
김기창의 말 그림은 티비에서만 봤지,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지 싶다. 와 그 말들은 참. 뭐 다른 말이 필요없다. 그냥 에너지로 넘쳐나더라.
혹시 김홍도가 말 그림을 그랬다면 그랬을까? 김기창이 한국전쟁당시 그렸다는 예수의 생애 그림을 보면서 정말 김홍도 생각이 많이 났다. 예수의 생애 그림은 진짜 보고 우와 우와 하면서 아이들한테 설명해주느라 (아이들이 교회,성당에 안나가서 성경 이야기를 참 잘 모르더라....) 사진을 못 찍어서 아쉽다. 예수가 갓을 쓴 한국인이다. 한국인 무대에서 예수의 생애를 여러 점의 그림을 통해 그렸더라.
중구난방으로 뛰는 것 같지만. 확실히 어느 지점을 향해 박차고 나가는 그 말들.
요즘 '회귀'라는 화두에 대해 부쩍 생각이 많은데. 이 말들의 향하는 지점은 어디일지. 아니 그 방향성보다. 그냥 뛰고 있는 생명력 넘침 그 자체가 너무나 눈부시더라.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김환기는... 훗날 환기미술관을 다시 가보게 되면. 그 때 따로 적어두고 싶다. 약 20년전 서울촌놈을 부암동을 찾아오게 만들었던 것도 김환기, 환기미술관이었다. 나는 마크 로쓰코같은 색면화가 좋더라. 그 때 그래서 친구따라 왔던 것인데. 이번에도 참 그의 그림은 나의 내면 어느 지점에 닿아있는 듯 했다.
플러스, 작품의 모티브가 된 시를 최불암이 읽어준 연출이며, 한쪽 공간을 넓게 할애해 그 작품에만 주는 스포트라이트하며,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미술관이 많이 신경쓴 것 같았다.
이 미술관 큐레이터는 어떤 사람일까. 수집가의 문장을 진짜로 쓰고 다듬은 사람은 누구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알고싶지 않기도 하다.
아이들에게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석파정 산책하며 스탬프찍기였다.
석파정은 본래 어느 양반의 집이었는데, 흥선대원군이 너무 탐을 내서 고종을 묵게 하고 뺏어갔다고 한다. 허 참. 고약하네 싶었는데. 석파정을 둘러보니, 부암동 분위기가 대부분 그렇긴 하지만, 정말 좋아도 너무 좋네, 탐낼 만 하네 싶었다.
가을 단풍이 더 깊어지면,
하얀 눈이 쌓이면 또 얼마나 좋을까.
***주차는 미술관 오픈런해서 가능했슴.
***주말 1시간반 무료, 우린 오래 머물러서 14,000원 추가 결제.
***미술관만 다녀옴. 나간 김에 여기저기 가야지 하면 피곤해짐.
***미술관내 다방이 있어서 전시 마치고 석파정 산책 전 요기했슴. 엄청 친절했슴.
***스탬프 다 찍고나서 미술관 선물 따로 없냐고 아이들 실망했슴.
***아이들도 김환기가 좋았다고 하는데.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노동에 주로 감탄함.
***한묵은 첫째아이가 특히 좋아했슴. 겹쳐지는 부분이 몇 군데 있다며 눈 빠져라 바라봄.
***이왈종 그림보며 자기도 할 수 있겠다며 좋아함. 사람보다 새가 더 크다며 웃음.
***두려움일까 사랑일까, 양가감정에 대해 끄적이는 자리가 있었는데 아이 둘의 차이를 절감
***첫째는 뛰어가서 호기롭게 먼저 종이를 잡더니 "뭘 쓸지 모르겠어요"라고 썼고, 둘째는 "나의 삶은 두려울 때도 있고 행복할 때도 있다.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이 영원하면 좋겠다. 왜냐면 인생이 영원하면 좋겠고, 행복이 영원하면 좋겠다. 하지만 두려움이 영원하면 좋지 않을 것이다. 나는 꿈을 두려워한다."라고 써내려갔다.
***애들 아빠는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이렇게 글을 써서 정리하다보니 새삼 드는 생각이다. 그러나 딱히 물어보고 싶지는 않다. 이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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