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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일기/그곳에서

강원도 고성

by 은지용 2022. 2. 9.

 

 

설날 연휴를 맞아 강원도 바다를 다녀왔다. 설날 음식준비 반나절을 준비하는 나름의 방어기제이기도 했고, 아이 방학을 핑계로 잡은 짧은 이벤트이기도 했다. 금요일 밤에 출발해서 일요일 아침식사 직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사실상 만 하루의 여정였다.

바다는 역시 거대했다. 객실에서 바다가 보이는 숙소였고, 새벽 4시쯤엔 바다 곳곳에 떠있던 불밝힌 고기잡이배를 봤다. 뜨끈한 방 안에서 자다가 창 밖 겨울바다에서 한창 일하고 있는 고기잡이배를 보자니 기분이 묘했다. 약간의 죄책감에 안락한 느낌이 더해지는 묘한 느낌. 아침 경매시장은 어떨까 상상하며 다시 잠들었고, 아침 7시반에는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시야의 한쪽 끄트머리에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하늘의 한쪽 구석에 있는 그 빛나는 동그라미는 온 하늘과 바다를 물들였다. 붉은 색을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자리에 무겁게 깔아두더니, 장막을 훅 걷어버렸다. 보라색 하늘을 살짝 보여준 듯도 싶었는데, 순식간이었다. 해는 금새 눈부신 금빛을 바다에 뿌리며, 감히 쳐다보지 말라고 신호한다.

깊은 잠에 빠져있던 첫째에게 귀띔해줬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 정말 많이 컸다. 혼자 바닷가에서 첫째는 파도를 바라보기도 하고, 이쪽 저쪽 해변을 뛰어다니기도 하고, 모래사장의 무언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한다. 바닷가에 오기 직전엔 시골 증조할머니댁에 시부모님과 셋이서 2박 3일로 다녀오기도 했다. 요 일주일 특히 이 녀석이 훌쩍 자랐다는게 새삼 느껴졌다.

둘째는 객실 안에서 햇빛과 바다와 게으름을 즐겼다. 내복차림으로 오빠가 노는 것을 보고, 침대에 누웠다가 이불을 덮었다가 했다. 둘째도 많이 컸다. 엄마와 떨어져 자는 것이 아직 많이 어색하지만. 문득문득 내 마음대로 할거야 심보가 심하게 튀어나오는 말투, 행동을 보면. 한숨이 나오면서도 잘 크고 있겠지 싶다.

아이들은 이 날 오전에 아빠와 바다에 나가 반나절 놀았다. 아이들은 바다에 오면 그냥 신난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조개 줍고 모래로 놀고 파도랑 놀고 신발이 젖기도 하고. 애들 아빠의 사진으로 전해본 그들의 바다놀이는 역동적이었다. 특히 첫째는 이제 완전 소년티가 나서, 바다에 원없이 돌을 던지는데, 팔과 어깨의 궤적이 제법 그럴싸 했다. 온 몸을 활용해서, 발 근육까지 써서, 돌을 멀리 멀리 던지더라.



나는. 나는 숙소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파도소리 들으며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하하.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명절 의미없어 보이는 부침개 부치기의 무게를 상쇄시킬 수 있는 만족감이었다. 브라이언 북클럽 필사 프로그램에 참여 중이었는데, 밀린 필사 두 건을 조곤조곤 할 수 있었다. 80일간의 세계여행 한 단락, 그리고 모비딕 한 단락.

모비딕. 거대하고 압도적인 바다. 배 위에 있으면 더 더 더 압도적이겠지?! 두 발 디딜 땅도 없는 바다 위에서는?!
80일간의 세계여행은 프랑스 작가가 썼는데. 영국인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영국인의 피 속에 내기betting가 흐르고 있다는. 주인공이 여행을 시작하자 주식시장에 상장되듯이, 사람들이 돈을 걸었다네. 거참...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나는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 인근 막국수 집에 갔는데, 달콤 짭자름한 동치미 국물이 기억에 남는다. 막국수는 우리 가족이 여행중에 주로 선택하는 메뉴인데, 막국수 먹으면서 국물까지 다 먹은 건 그 집이 처음이다. 동치미 살얼음이 낀 막국수 였는데, 소리도 맛있었다. 고기는 불판에 올려줘서 더 맛있게 먹었다. 동치미 국물 포장하고 싶었는데, 집 가서 먹으면 분명 그 맛이 아닐거란 걸 알기에, 욕심 부리지 않았다.

막국수 집에는 마당이 있었고 눈이 쌓여있었다. 아이들에겐 여기도 너무나 훌륭한 놀이터였다. 나는 추워서 차에 들어가 있었는데, 그 눈밭에서 30분 넘게 아이들은 신나서 놀았다. 도대체 뭘 하고 놀았냐하면. 주머니 속 물건 눈에 찍어보기. 물건들 의인화해서 아무말 대잔치 놀이하기. 눈에 발 빠뜨려보기. 뭐. 그런 식이다.

중간에. 아주 큰 무리의 철새가 북쪽으로 날아갔다. 차 안에 있는 나에게도 엄청난 무리의 그림자가 느껴졌다. 그림자가 끊이지 않아 나와서 무슨 일인가 하늘을 올려다보게 만들었던. 동쪽 해안가로 날아오는 새들은 언제나 이리로 오겠지. 쨌든 나와 다른. 우리와 다른. 생명체 무리를 접하는 것은 신비로웠다. 어딘지 상서롭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압도적이고 신비로운 자연 속에서 고성에 있는 작은 해변을 찾았다.

가진해변이었나. 또 바다다. 마음이 어지러워 보이는 아저씨 한 분이 앉아서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더라. 바닷가 앞에 통유리 건물이 있었고, 베이커리 카페라고 간판이 달려 있었다. 난, 거대한 바다보다는 다른 느낌을 찾았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주택가 사이의 어떤 연두색 지붕 건물. 얼핏 보면 Anne앤이 사는 시골주택 같기도 한 그 곳. Tail coffee 테일커피라는 곳이었다.

햇살이 잘 드는 그 곳은 정말 쓰러질 것 같이 낡았다. 건물은 늑대가 와서 훅 불면 폭삭 쓰러질 것 같았다. 카운터 옆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바깥 소리가 다 들렸고. 정성들여 꾸며놓았지만. 벽체는 얇고, 건물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난 느낌이었다. 공간도 좁았다. 그런데. 무지하게 따스한 느낌이 드는 희한한 곳이었다.

이 곳 마당에도 눈이 쌓여 있었다. 햇빛에 혹해 바깥에 앉기엔 너무 추웠다. 나무창살 너머 안쪽 공간에 자리잡았다. 아이들은 마당에서 놀다가, 짧고 좁은 골목길을 지나 바닷가로 나가 놀기도 했다. 입구에 모아둔 조개껍데기들과 닳고 닳은 유리조각은 우리집 아이들 감성에 딱 닿아있어서, 아이들이 건드리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커피 맛 잘 모르는 나는. 그 공간이. 마냥 좋았다. 제주 여행 온 것 같은 느낌? 아 모르겠다. 아무튼 좋았다. 이후 송지호를 거쳐 칠성북살롱을 들렀는데. 테일커피의 조용하고 한적하고 좁고 쓰러질 것 같은데 햇빛 따사로운 연두색 지붕, 요 느낌이 내 마음 꼭대기에서 가시지 않았다. 또 가도 좋을까? 그건 모르겠다.



속초의 칠성조선소도 들렀다. 까페는 들어가보지 않았고, 조선소와 북살롱을 거쳤는데. 현재 제조업에서 일하는 나로선. 그 조선소의 과거가, 유명세에도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처량한 느낌이 드는 현재가, 싸하게 와닿았다. 순전히 개인적인 감정이다. 나의 미래는, 내가 일하는 제조업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슬쩍 생각해보려다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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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하고 압도적인 바다.
소박하고 따사로운 어느 연두색지붕 커피집.
눈부시고 한가한 송지호.
쓸쓸한 듯 번잡하고 번창하는 것 같은 칠성조선소.
일요일 점심은 집에 와서 먹었다.

교암막국수.
여행중 아침은 숙소에서 계란후라이, 소세지, 체리, 방울토마토, 오렌지주스, 바게트 샌드위치 먹었는데. 둘째가 어느날 그런 아침식사 너무 좋았다고 말하더라. 딸은 호텔조식 스타일이구나 ㅎㅎ
차안에서 돌아가며 신청곡을 받아 유투브 뮤직에서 찾아 들었다.
아이들이 차안에서 너무 시끄러웠다.
첫째는 얼굴에 마스크 자국을 남겼다. 마스크 자국을 경계로 바깥쪽은 한톤 어두워지고 주근깨도 짙어졌다. 바다+증조할머니댁 일정 탓이리라.
나만의 시간이 있어서 너무나 좋았다. 오래된 무언가와 닿아있는 시간이라 더 좋았던걸까. 무한한 바다와 닿아서 더 좋았을까. 돌이켜보면 소박한 공간도 있어서 더 좋았다.
2022년 1월말. 기록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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