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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읽기/Hamlet

2막 연극에 진심

by 은지용 2023. 11. 17.


2막에서 알게 됐다.
햄릿도, 셰익스피어도, 연극에 진심이다.

햄릿은 슬슬 미친 척 연기하는데, 이는 유령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증거를 찾기 위해서다. 그 증거란 것은 물증 아닌 심증.

마침 연극배우 몇몇이 햄릿이 있는 덴마크 궁전을 방문한다. 햄릿은 그들의 연기 실력을 직접 확인한다. 배우들에게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 트로이 왕의 죽음을 언급하는 부분을 읊을 것을 지시했다.

아. 이 부분. 후까시 작렬한다.
영화의 한 장면. 쿠엔틴 타란티노의 유혈낭자 스타일에 구스반산트 감독의 서정, 드뇌 빌뵈브의 스케일있는 쿨함이 섞였다. 베르길리우스가 궁금해졌다.


의지와 결행 사이
칼이 잠시 공중에 멈췄다가
트로이의 늙은 왕 프리아모스을 내리치는 장면!

아이네이스의 주인공 즉 아이네이아스는
왕의 죽음을 목격한 후 희망을 접고
트로이를 버리고 도망쳤다.
세상 끝난 것 같았지만.

카르타고로 쓸려갔다가 디도라는 사랑을 만났고
훗날 이탈리아 라티움 지방에 정착해 삶을 이어간다.
이게 에이네이스의 이야기라고 들었다.

그는, 로마의 시조가 되는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할머니의 고조할아버지의 고조할아버지쯤 되는
실비우스를 낳는다던데…
야튼.

아이네이아스가 본 트로이 함락의 날,
그 늙은 왕 프리아모스가 내려쳐지던 모습이
아주 드라마틱하게 그려졌다.
프리아모스는 Prium
Prime이 연상된다.
몰락한 Prime..
 
트로이의 마지막 왕, 노쇠한 왕 프리아모스로,
피터 오툴을 떠올리며 안타까워 했더랬다.
내 20대 70mm영화의 로망,
피터 오툴 ㅠㅠ


네이버 검색 이미지 : 피터 오툴


쨌든. 햄릿이 대사를 시작하고. 플로니어스까지, 대사에서 억양과 내용이해를 평가하더라. 이 등장인물들은 다들 한 연극/연기 하는 사람들이었던 것.

햄릿은 이제 연극을 준비한다.

그는 정말 연극이,
왕의 마음에 닿는 연극으로
왕의 범행에 대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고 믿더라.

배우들의
셰익스피어같은 극작가의 고뇌가
햄릿의 고뇌와 닮았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의 말들이, 대사가, 의지로,
분명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때 희열이 느껴지지만
실제로 내가 행하는 것은 별로 없다는 자괴감?



살해당한 아버지의 아들인 내가
하늘과 지옥으로부터
복수하라는 교시를 받았음에도
창녀처럼 말로만
신세타령을 펼쳐놓고는 곧바로
매춘부처럼
저주의 말을 뇌까리면서도
벌리고 눕다니!




햄릿은
왕의 심중을 찌를 연극을 준비하고 있지만
실제 왕을 끌어내진 못하고 있고
목숨을 끊는 복수를 행하진 않았고
엄마인 왕비는 아빠가 죽어도 여전히 왕비로 있고
햄릿 스스로도 궁전 안 그들의 휘하에 기거한다.

작가는
누군가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을 희곡을 쓰지만
실제 그들의 삶에 들어가 살진 않고
그림자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누군가의 환호와 호응이 필요하고
그들의 치부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샘솟지만
그들이 내는 입장료와 인기, 후원금에 기대어
하루를 이어간다.

기자는
특히 산업부 기자는
그 산업계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들의 폐부를 찌를 무기를 등 뒤에 챙겨두고
그들을 위해 일하는 척 산업의 길잡이인듯
방향을 잡아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지만
정작 그 산업에 기생하며 먹고 산다.

좀 극단적으로 얘기했지만

제조업 직원은 …

엄마는 …

선생님은 …

계속할 수 있을 것 같다…

요는 연극에 진심이지만
연극의 무용함에 신물이 나는
연극인의 마음이랄까. 너무 나갔나.
삶에 진심이지만. 그 엔트로피 더미에 신물이 나는
어느 보통 사람의 마음이 햄릿에서
얼핏 보인 듯도 하다.



PS.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마거릿 애트우드가 다시 쓴 ‘템페스트-마녀의 씨’를 보고 있다. 이 글 쓰고나서 본 거기 어느 한 줄이 마음에 꽂혔다.

연극이 정말 그렇게 가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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