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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읽기/Demian

종교와 철학 사이

by 은지용 2022. 6. 26.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진도맞춰 책을 읽어가다보니, 그들의 단상에서 새롭게 얻는 것들이 있다.
최근에는 이 책 '데미안'이 '종교적'이란 다른 멤버의 단상이 눈에 띄었다.

 

나는 책이 종교색채가 짙은 배경을 갖고 있긴해도 딱히 종교적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아벨과 카인,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냥 현상을 다르게 보는 방법을 말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마음 깊이 기독교인인 사람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는 얘기인 것 같다.

단톡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침묵 속으로 들어가거나, 책 읽기에서 이탈하는 것 같을 때. 이 책이 여럿이서 천천히 깊이 읽기엔 쉽지 않은 책이구나, 곤란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도 내가 얻어갈 수 있는 메세지 한 두 가지만 울림있게 얻어간다면. 그걸로 된 것 아닐까.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방법으로 철학하는 것 같다. 철학이 사고를 명료하게 하는거라고 보면, 그래서 하찮고 의미없어 보이는 삶을 똑바로 바라보고자 하는 수단을 이용하고 개발하는 것을 이른다면. 사람들은 다들 나름 철학한다. 종교의 형태를 띠기도 하고, 그림이나 춤 영화 음악처럼 예술경험 형태이기도 하고. 명상, 산책 등을 통해 생각을 정리하기도 한다. 이것도 안하거나 못하는 사람도 있을테니, '인생에 한번쯤 의문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나'라고 바꾸자.....

영화 'Don't look up'이 떠오른다. 지구에 혜성충돌이 일어날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그래서 인류멸망이 예견된 상황에서, 지금 사람들이 대처할만한 여러 모습이 나온다. 아주 유쾌하면서도 불쾌하고 웃기다. 절망적 상황에 대처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 가운데, 한 장면이 자꾸 떠오른다. 영화 스토리를 이루는 주요장면은 아니었다. 인류를 멸망시킬 유성우 불 비가 쏟아질 때, 의복을 갖춰입고 샤먼의식을 하는 듯 춤추던 산 위의 한 사람. 종교는 참 사람을 신비롭게 하는 것 중 하나인 것 같다.

Don't look up의 한 장면. 왜 이 장면이 자꾸 떠오르나 모르겠다. 이렇게 철학하는 사람도 있는거겠지.



데미안 3챕터까지 다 읽은 주말. '종교적'이란 말에 자극받아서일까. 왠지 모를 이끌림으로 책장 어딘가에 박혀있던 '도마복음강의'를 꺼내봤다. 오쇼 라즈니쉬가 정식 인정받지 못한 어떤 예수 복음서를 강의한 것을 옮겨 적은 책이라 들었다. 진작에 절판되었다. 아무데나 여기저기 펼쳐서 봤는데, 데미안과 통한다. 그 가운데 도마복음강의의 서문은 데미안과 참 닮았다.

 

<도마복음강의 서문 발췌> 


"나는 기독교적인 환경에서 성장했다. 가족, 학교, 주일학교, 그리고 예수의 복음 이야기를 들은 나를 선량한 인간으로 만드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온유함과 친절함과 훌륭한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사는 것이 나의 삶의 길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이 언제나 보고 계시다는 자각에도 불구하고, 나의 깊은 내면에는 어떤 어두움이 숨어 있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음침하고 부정적인 죄의식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세상이 주는 풍요로운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 축복된 미래에 대한 꿈들로부터 벗어났다. 사실 그 세속적인 환상들은 작고 조심스럽고 안전하며 무엇보다도 실속이 있는 멋진 것이었다.


스승 오쇼의 곁에서 몇년을 지낸 후 다시 이 책을 대하면서, 나는 예수의 능력, 그의 말씀과 그의 존재 앞에 비틀거렸다. 내가 그를 통해 본 것은 나 자신과 모든 사람들에 대한 구원의 가능성이었다. 나는 예수의 진정한 본질이 지난 2천년 동안 눈 먼 인간들에 의해서 완전히 잊혀져 왔음을 알았다.


이 책은 꿀 같은 복음 이야기가 아니다… (중략)…


도마 복음은 기존의, 안락한 종교에 흡수되어야 할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예수의 검이다. 오쇼는 한 자루의 검이다. 그는 무제한의 자비로써 우리들의 자기기만과 환상들을 가차없이 자른다. 그리고는 거기에 진정한 혁명-존재의혁명-의 씨앗을 심는다."

 

<데미안 프롤로그 발췌>

 

"나 자신을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라고는 감히 부를 수 없다.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는 구도자였으며, 아직도 그렇다. 그러나 이제 별을 쳐다보거나 책을 들여다보며 찾지는 않는다. 나는 내 피가 몸속에서 소리 내는 가르침을 듣기 시작하고 있다. 

 

내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 꾸며 낸 이야기들처럼 달콤하거나 조화롭지 않다. 무의미와 혼란, 착락과 꿈의 맛이 난다. 이제 더는 자신을 기만하지 않겠다는 모든 사람들의 삶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이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의 점액과 알껍데기를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사람은 모든 사람은 인간이 되기를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돌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어머니가 같다. 우리 모두는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풀이를 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 뿐이다."

 

그리고 <도마복음강의>는 아래와 같이 책을 맺음한다.

"나는 그대가 크리스천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것은 소용없다. 그것은 거짓이다.
나는 그대가 그리스도가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대는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 그대 역시 같은 씨앗을 지녔기 때문이다."


신체적 한계를 초월하고, 나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감을 주는, 그런, 사람의 신성(god)이 누구에게나 있고, 성취할 수 있다는 얘기. 덕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란 설명이 뒤에 있었다. 흔히 인간 탄생의 원인이 되는 성생활은 흔히 더러운 것으로 치부된다. 유교에서도, 기독교에서도, 이슬람교에서도. 인간의 원죄는 거기에서 오는 것일까. 수태고지는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이며, 꿈을 통해 임신하는 것 역시 비범한 영웅에게서나 볼 수 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성경이 성직자들 입장에서 쓰인 요정이야기 같은 면이 있다고 말한다. 엄청나게 오래된 얘기는 분명 사실을 말하지만, 얘기하다보면 잘려나간 부분도 있고 양념도 많이 쳐져있다는 것이다. 반쪽짜리. 예수 옆에 같이 못박혀 죽은 도둑 둘 가운데 마지막에 회개한 사람은 의리가 없는 사람이며, 친구로 삼기엔 오히려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악마와의 의리를 지킨쪽이 좋다며, 아주 신박하고, 어찌보면 불경한 이야기를 하고 그는 이야기를 이어간다.

"여기에 이 종교의 흠을 아주 똑똑하게 볼 수 있는 점이 하나 있는 거야. 중요한 건 이 온전한 유일신, 구약과 신약의 신이 탁월한 분이기는 하지만 원래 그가 표상하는 신은 아니라는 점이야. 그는 선, 고귀함, 아버지다움, 아름답고 드높은 것, 감상적인 것이지. 옳아! 그러나 세계는 다른 것으로도 이루어져 있어.

그런데 다른 건 죄다 그냥 악마한테로 미뤄지는 거야. 세계의 이 다른 부분이 통째로, 이 절반이 통째로 숨겨지고 묵살되는 거야. 바로 사람들이 신을 모든 생명의 아버지로 기리면서도 생명이 근거하는 성생활은 간단히 묵살하고 어쩌면 악마의 일이며 죄악이라고 선언하는 거야! 이런 신을 여호와라고 존경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반대하지 않아, 조금도 반대하지 않아.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존경하고 성스럽게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해. 인위적으로 분리시킨 이 공식적인 절반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를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신을 위한 예배와 더불어 악마를 위한 예배도 가져야 해. 그게 올바른 일인 것 같아. 혹은 예배를 하나 더 만들어야 할 것 같아. 악마도 그 안에 포함하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세상일들이 일어날 때 그 앞에서는 눈을 감지 않아도 되는 신을 위해서 말이야."

하긴.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도 일년의 절반은 지하로 간다. 저승 신 하데스와 머물기 위해. 그래서 일년의 절반은 데메테르가 기쁜 마음으로 일하며, 봄과 여름을 보내고. 나머지 절반의 시간 동안 정신을 놓고 딸을 찾아 방황하기에, 나무는 잎을 떨구고 겨울을 보낸다고 한다. 그렇다고 나머지 절반이 없는 시간은 아니다. 그것 역시 한 해를 이루는 축이다.

 

속물같은 나도 나이고, 화내는 것도 나이고, 구질구질한 것도 나이면서, 책 읽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도 나의 모습이다.

 

아마 종교는. 오래되고 권력체계가 확실한, 형식이 분명한 종교는. 남들이 만든 형식에 따라 철학하게 하므로 개인의 입장에서 완전하지 않을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데미안의 이야기는 틀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생각하라는 말로 들린다. 딱히 종교적이지 않은 나에게는 말이다. 


데미안은 챕터 3에서 수업시간 중에 완전히 자기 자신 속으로 들어가버린다. 거북이가 껍질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눈을 뜨고 있지만 마음은 여기 없고, 거의 죽은 것 처럼 보였다. 파리가 얼굴을 기어다녀도 움찔하지 않았다. 너무나 기이한 모습. 이 사람 도대체 무슨 사람인가. 거참.

싱클레어는 이제 모든 것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 자기 내면을 의식한다. 하지만 아직 자기만의 기준을 세운 것은 아니고, 기존의 세계가 온전하지 않은 것 뿐이다. 거울에 비친 나를 보는데, 그 거울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 내가 되기 위해선 아마 몇 번의 겨울을 지내야 하지 않을까. 싱클레어는 집을 떠나 중고등학교로 혼자 진학했다. 데미안을 만나지 못한 채 떠났고. 그 역시 자신의 방법으로 자기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초록잎은 모두 떨군 채. 

That is the way leaves fall around a tree in autumn, a tree unware of the rain running down its sides, of the sun or the frost, and of life gradually retreating inward. The tree does not die. It waits.

I was alone.

 

잊을만하면 잠수타던 그 친구도 떠오르고. 생일이면 핸드폰을 꺼놓았다던 나의 과거도 떠오른다.

처절한 거짓말과 고등학생치고 주도면밀한 준비를 하고 사라진 그 친구도 떠오른다.
앞으로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싱클레어는 어떤 사람이 될지.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어떤 봄일지.

헷세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펼쳐갈까.

그 친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별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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