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220

산타클로스딜레마 나는 중학교 입학 직전까지 산타클로스가 빨간 옷을 입고 하얀 수염을 단 배불뚝이 할아버지의 형태로 실존한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매년 크리스마스에는 우리 집에 굴뚝이 없어도 뭔가 신비한 그 수염난 할아버지만의 방법으로 선물을 두고 가는 것이라 믿었단 말이다. 산타클로스가 세상에 실존하되, 대부분 부모님의 형태로 살아있다는 사실을 나는, 상당히 머리가 커질때까지도 몰랐다. 그 날. 또래 친구가 아파트 단지의 어느 주차된 차 앞에서 산타클로스는 엄마아빠잖아, “그것도 몰랐어?!” 하던 그 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세워져있던 어느 작은 자동차 유리창 뒤에서 수다를 떨던 중였다. 한낮이었고 그 차에는 똥차라는 낙서가 있었던 것 같다. 그 친구 생일은 나보다 하루 빠르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 2012. 3. 14.
프롤로그 2012년 4월 1일. 여느 그렇고 그런 만우절이 아니다. 내가 아이를 낳을 날이다. 2012년 1월 11일. 여느 그렇고 그런 내 생일이 아니다. 오늘이다. 어느날 갑자기 결혼이란 단어를 실감하게 하는 누군가를 만나고, 덜컥 식을 올려버리고, 시댁식구가 생기면서 덩달아 친정식구도 생기고, 거기에 조카가 태어나는 사건이 일어났고, 내 뱃속에 아이도 생겼다. 눈 깜짝할 사이에 30년 이상 도무지 나의 것이라 생각해본 적 없는 일들이 1년 안에 일어나고 있다. 사실 순차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일어난 것이긴 하다. 하지만 여전히 문득문득 이 현실이 어색하다. 어색하기만한건 아니다 물론. 대부분의 시간이 어쩐지 낯설면서도 너무나 즐겁고 기쁘고 간혹 슬플 때도 있지만서도 대체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충족감을 느끼게.. 2012. 3. 14.
상추곡, 가을색 짙은 정읍에서 산과 들에 노을이 들었다. 밤이 오기 직전 화려한 색을 태우는 노을같이, 겨울을 예감하는 가을 들은 온갖 열매와 잎으로 노랗고 붉은 물이 들었다. 전북 정읍은 가을색이 유난히 곱기로 이름난 곳. 붉은 내장산, 구절초 흐드러진 소나무 동산, 황금물결 일렁이는 논 바다, 그리고 명망 높은 선비와 무명 농민의 흔적이 진하게 각인된 곳이다. 전북 정읍은. *내장사의 아침 우물이 많아 정읍이라 했다 한다. 동진강, 섬진강을 아우르고 있어 그런가, 집집마다 우물을 파면 물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풍부한 물에 김제로 이어지는 평야와, 내장산으로 대표되는 산간지역을 끼고 있어 예부터 식재료가 풍부한 지역이기도 하다. 내장산 아래 오래된 여관에서 운영하는 식당에 들렀다. 소박한 이곳의 추천메뉴는 산채정식. 역시나 소박한 .. 2011. 11. 10.
이천 복숭아 농장의 하루 복숭아. 예부터 어여쁜 배우자의 상징이자, 신선들의 회동에 빠지지 않는 과실였다. 그 중에서도 황도는 말랑한 과육과 최고의 단맛으로 복숭아철의 대미를 장식한다. 9월이 다 지나가고 마지막 더위가 성질을 부릴 때 즈음, 수확이 한창인 황도를 찾아 경기 이천의 한 농장을 다녀왔다. 미리 말해두는데, 이번 달 여행기는 실상 여행이라기 보다 노동의 기록에 가깝다. * 토라지고 다치기 쉬운 복숭아 사람의 인연이란 참 묘해서, 어쩌다 경기 이천의 한 작은 복숭아 농장에 연고가 생겼고, 그곳에서 일품을 팔게 됐다. 농사에 신통방통해 보이지 않는 나에게 맡겨진 일은 그저 무게에 따라 선별된 복숭아를 상자에 넣기이다. 그러나 과육이 무르고 쉽게 멍드는 황도를 상자에 넣어 포장하는 것이 말처럼 쉽진 않다. 황도 수확에는 .. 2011. 10. 18.
사과 오미자 익는 문경 제법 가을분위기가 나는 높고 파란 하늘. 그 앞에 펼쳐진 산세가 힘차다. 유유자적 흐르는 영강은 오후의 햇빛을 받아 강가에서 오수를 즐기는 사람들마저 반짝반짝 빛나게 한다. 고모산성 진남교따라 놓인 옛 철길은 한가하고, 마을마다 사과와 오미자가 빨갛게 익어간다. 가을 초입에 선 경북 문경의 풍경이다. @ 사과, 오미자 익어가는 마을로 아까부터 자꾸 하늘을 올려다보게 된다. 평지로부터 번쩍 솟은 주흘산, 조령산, 운달산이 시선을잡는다. 운달산 주변 쪽빛 하늘 위로 오색의 패러글라이딩 낙하산이 미끄러진다. 햇빛은 따갑지만 높고 푸른 하늘에 마음이 상쾌하다. 901번 도로, 문경읍에서 동로면으로 넘어가는 길을 달린다. 창을 열고 바람을 맞으며 가는 길. 집이나 사람보다 논, 논보다는 사과나무가 더 눈에 띈다... 2011. 10. 18.
경기 광주 여름 빨강 지긋지긋한 장마가 끝나고 폭염이 시작됐다. 한여름이다. 충분한 습기와 뜨거운 햇빛을 머금은 자연의 녹색은 그 세가 절정에 올랐다. 한강에 비친 경기도 광주도 무서운 기세의 녹음이 장악했다. 그 기세만큼이나 농산물 간이 가판대도 도로 곳곳의 빈틈을 채웠다. 생명력 넘치는 녹색에 한창 철 맞은 광주 토마토의 빨강, 그리고 조선왕실 백자를 굽던 분원도요지의 말 없는 하얀 빛이 더해져, 지금 광주는 다채롭기 그지 없다. (이 글이 게재된 때는 7월말 8월초였으니..) # 가판대 위 빨간 토마토 이맘때 광주의 가판대는 토마토 철 막바지를 맞아 빨갛게 물든다. 서울에서 가까운데다 맛집군락과 나무가 우거진 운치있는 드라이브 코스로 이름난 남한산성 길. 아침까지 흩뿌린 비로 박무 낀 길 따라 경기도 광주로 넘어가니, .. 2011. 10.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