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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일기44

여수기행 봄 마중은 역시 남도로 가야 한다. 그 마음 하나로 새벽녘 서울 용산에서 전라선을 탔다. 전주를 지나면서 나를 제외한 모든 승객이 서로 아는 것처럼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더니, 차창 밖으로 비치는 논밭이 제법 파릇하다. 노란 꽃봉오리가 맺힌 성질 급한 산수유도 금방 스쳐갔다. 그러다 느닷없이 너른 바다와 큰 배들이 등장했고, 열차의 종착역 전남 여수에 도착했다. * 서 너 걸음마다 이순신과 바다 낮 기온이 10도 이상 올라간 푸근한 날이었다. 여수역에서 여행객들에게 차를 빌려주는 아저씨는 큰 눈과 둥근 쌍꺼풀의 전형적인 남방형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역시 남쪽이구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차를 빌려 처음 간 곳은 국보급 목조건물, ‘진남관(鎭南舘)’. 여수 시내에 위치해있고 입장료도 없어서인지 푸근해진 날.. 2011. 4. 27.
가평, 얼음 아래 세상으로부터 벌써 며칠 째 한강이 얼어붙어있는지 모른다. 이런 날씨엔 따뜻한 구들장 아래에서 뒹굴기만 해도 좋을 법 한데, 굳이 밖으로,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가평은 이런 ‘센’ 사람들을 위한 곳 중 하나다. 하긴, 얼음을 깨고 하는 송어낚시나, 눈 내린 잣나무 숲길 산책, 차디찬 캠핑장 공기를 녹이는 모닥불 체험은 여름에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스키 말고도 추위를 즐기는 방법은 많다. @ 얼음 아래 세상으로부터 한 때 북한강으로 유유히 흐르던 냇물이 꽝꽝 얼어붙었다. 단단해진 물방울은 그 위에 사람들이 가득 올라가도 흩어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새로 개통된 신청평역 앞 냇가 이야기다. 1월 내내 송어잡이가 한창이던 이 곳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얼음에 난 작은 구멍을 바라보며 강태공이 됐더랬다. 송어낚시.. 2011. 4. 27.
겨울이 오는 냄새, 경북 청송 겨울이 오는 냄새는 길가 한 쪽에 쌓인 낙엽더미에서도 난다. 한겨울, 방안으로 막 들어온 누군가의 어깨에 실려오는 찬바람 냄새 같기도 한 그것이 낙엽 사이를 비집고 다니다 코끝에 닿는 모양이다. 기세 등등한 초겨울의 향은 바야흐로 푸른 솔밭의 고장, 경북 청송(靑松)에도 진동하기 시작한다. # 청송 여행의 정석, 주왕산과 솔기온천 경북 청송의 주왕산은 옛날 당나라 주왕이 숨어살았다는 명산이다. 그만큼 산이 깊고 비밀스러운 경치를 간직했다는 얘기인데, 역설적이게도 지금 주왕산은 청송군에서 가장 왕래가 많은 곳이다. 특히 겨울의 문턱에 다가선 이 맘 때에는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주왕산은 등산로 초입 대전사에서부터 보는 이를 압도한다. 산을 지키는 사천왕처럼 버티고 선 기암 때문이다. 대전사 대웅전 .. 2010. 12. 8.
고창, 붉은 흙에 물드는 붉은 단풍 가을이 간다. 늦기 전에 시 한 수 읊으며 붉은 단풍 아래에서 그보다 더 붉은 술 한잔하고, 바람처럼 흩어질 가을을 즐기는 호사를 부려보자. 노릇노릇하게 익은 풍천장어 소금구이는 안주. 술은 복분자로 담근 것이고, 읊을 시는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라던 서정주의 “자화상”이다. *붉은 흙에 물드는 붉은 단풍 고창 어딘가를 달리다 차를 멈췄다. 주변을 둘러보니 멀리 어리는 높은 산 앞으로 고만고만한 구릉 밭이 펼쳐진다. 무 배추가 한창 자라는 밭도 있고, 아직 작업이 남은 노란 논도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제 막 수확을 끝낸 듯 비어있는 붉은 땅. 고창의 흙은 붉다. 땅이 열매도 물들이는 걸까. 고창의 특산물은 덩달아 붉은 빛을 띤다. 복분자는 겉과 속이 모두 검붉고,.. 2010. 11. 21.
기찻길 옆 한약사랑방, 제천 날이 제법 쌀쌀해졌다. 너무 더웠던 여름을 지낸 터라 찬바람이 반갑다. 다만 초가을 바람에 색이 바랜 나뭇잎 따라 마음도 알싸해지는 것이, 어디든 훌쩍 바람 쏘이러 다녀와야만 할 것 같은 충동이 인다. 홀가분하게 떠나는 길, 자유낙하하는 낙엽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기차를 이용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번에는 영동선, 충북선, 중앙선이 교차하는 청풍호반의 고장, 충북 제천에 다녀왔다. *기찻길의 사랑방, 제천 기차를 타는 것은 정해진 운명을 따르는 것과 같다. 시각에 맞춰 열차에 올라타기만 하면, 우리는 누군가 놓아둔 철로와 정해진 노선을 따라 예정된 장소, 약속된 시간에 도착한다. 물론 출발시각을 맞추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열차 대합실에서 종종 목격되는 플랫폼으로 전력달리기 하는 사람이 그 증거다. 본.. 2010. 11. 21.
경남 남해, 멸치 마늘 다랑이논 그리고 집밥 여름의 막바지, 어느덧 무릎을 넘겨 자란 벼가 익기 시작했고 성질 급한 논은 벌써 노란빛이 돈다. 이미 올해 첫 수확이 이뤄졌다는 소식도 들린다. 밥 힘으로 사는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반가운 소식이라, 이번엔 특별한 쌀 재배지를 다녀왔다. 경남 남해 다랭이마을과 그 일대가 이번 여행지인데, 그렇다고 남해가 어떻게 특별한가 묻는다면 좀 난처하다. 카메라에 담기 힘든 남해바다의 절경은 물론, 다랭이 마을의 지게길 정경과 밖에 나와 먹는 집밥의 감동을 경험해보지 않은 이들에게 어떻게 온전히 전해줄지 걱정이 앞선다. * 다랭이 마을의 아침 새벽부터 밥을 하시는지 주인아주머니 움직임이 부산하다. 한지로 마감한 방문으로 삐걱거리는 나무마루 소리와 아침 빛이 투과된다. 주섬주섬 챙겨입고 나선 산책길. 여름의 막바지.. 2010. 9.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