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박물관 주변 안국동 탐방
오전에 출발했다. 집 앞 연못에 수련이 피어있었다. 아이는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사진 찍는 김에 가는 길 짬짬이 너의 기분을 메모해 보라고 했다. 기행문 쓰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지하철에서는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초5 국어 기행문 페이지를 굳이 찾아서 보여줬다. 초 5 교과서에서 얘기하는 기행문의 3요소: 여정, 견문, 감상. 아이의 기행문 쓰기에 도움이 되었을까? 다른 건 몰라도 기행문에 겁은 먹지 않았던 것 같다.
6월 6일 현충일. 남편은 출근했고, 태극기는 진작 달았다. 집 앞 도서관은 문을 닫았다. 첫째는 이번주 기행문 수행평가를 앞두고 있었다. 기행문 과제가 주어지자마자 분명 머리 싸매고 '못 쓰겠다' 통곡할 모습이 그려졌다. 그래 서울 나들이 가자. 기행문 거리 선수를 치자. 경복궁은 더울 것 같고. 경복궁 옆 동네 서울공예박물관 주변으로 예쁜 물건 파는 가게 이곳저곳 골목길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다가 인사동 쌈지길 구경 다녀와야겠다 싶었다. 초등 아이 둘과 교통카드와 물을 들고 인사동으로 가자며 길을 나섰다.
엄연히 말해 인사동은 스쳐 지나갔다. 안국역에서 내려 안국동, 화동, 송현동, 관훈동 일대를 주로 다녔다. 안국역에서 내려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안국동. 서울 공예 박물관, 덕성여고도 안국동. 덕성여중과 공예박물관 서쪽 경복궁 방향 공터는 송현동. 윤보선 생가 있는 골목길은 화동. 큰 길 건너 인사네거리 이르기 직전 '쌈지길' 건물까지가 관훈동이다. 인사동은 인사네거리 지나서 탑골공원 방향으로 이어진 동네다.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에 많은 이름이 걸쳐있더라. 대부분 인사동 근처로 퉁친다.
오전에 길을 나섰지만 안국역 도착하니 12시가 거의 다 됐다. 남들보다 한 템포 빠른 식사시간. 식당 검색은 피하고 싶었다. 길을 걷다가 내키는 곳, 인연 닿는 곳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간판에 '계동 마나님'이라고 쓰여진 곳이었다. 조용하고 메뉴도 건강해 보였다. 아이들은 더 걷고 싶어 하지 않았다. 왜 계동일까. 정작 그곳은 종로구 화동이었는데. 마나님께 묻기는 어려웠다. 너무 캐릭터가 강했다. 숟가락도 엄격하게 개인 것만 쓰고, 주문은 종이에 써서 하며, 가게에 들어올 때에도 기다렸다가 손소독하고 안내받으라고 호통치셨다.
통밀국수랑 버섯 마라탕을 맛있게 먹었다. 마라탕은 그나마 자극적인데, 통밀국수는 매우 삼삼한 건강한 맛이었다. 반찬은 콩알만큼 내 주신 귀한 장아찌였다. 강화 순무랑 머위. 그저 김치나 단무지가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런걸 요청했다가는 몰상식하단 소리 들을 것 같아서 말았다. 아이들은 음식보다는 가게 자체를 좋아했다. 가게 곳곳에 냅킨에 사람들이 맛있게 먹고 간다는 메모를 써서 붙여두었더라. 외국어로 쓰인 것도 꽤 많아서 찾아보는 재미가 있었다. Age 7의 영국 여자아이, 서울에서 제일 훌륭한 비빔밥이란 코멘트, 마나님을 그린 메모들이 있었다.
아이들이 요즘 식물에 관심이 많은데, '크레이지 가드너'에서 본 식물들이 잘 자라는 집이었다. 첫째는 반에서 식물부 활동을 하고 있어서 더 관심있어 했다. 홍콩야자는 우리 집 것과 비교도 안되게 컸다. 가게 앞 바질 등의 허브밭도 예뻤다. 식물을 잘 키우는 분인 듯했다. 가게 한쪽에는 마루가 깔려있고 책이 꽂혀있어, 마나님이 쉬는 공간이 되었다. 옛날 집 같아서 아늑했고. 색다른 음식을 경험한다는 점에서 신선했다. 하지만 벽에 붙은 메모지처럼 '서울에서 제일 맛있는 집'이란 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나오면서 우리는 합의했다.
"저녁에는 몸에 안 좋은 음식 먹자."
골목 곳곳의 누구누구 생가, 종이 달린 교회 건물은 스쳐갔다. 한낮의 더위는 사람의 시야를 좁히는 것 같다. 한옥 건물도 경주에서 많이 봐서인지 감동이 덜했다. 아이들에겐 외국인이 동네보다 많은 게 더 눈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계속 그 얘기다-외국인이 왜 이렇게 많아. 더워서 팥빙수도 하나 먹었다. 점심 먹고 빙수 하나 먹으니 하루 예산의 절반 이상을 이미 써버렸다. 골목은 그만 돌고 공예박물관으로 갔다. 입장료가 없다. 건물 곳곳에 비치된 화분과 식물이 정말 근사했다. 아이들도 나도 박물관 전시보다 건축물 내외부의 요소에 더 관심이 많았다. 거대한 은행나무에 파동처럼 퍼져가는 돌과 풀로 장식된 정원과 수련 돌 탁자가 멋졌다. 그렇지, 여긴 공예박물관이지.
공예를 테마로 하는 어린이박물관은 인터넷 예약을 해야 하는 거였고, 현장접수분은 이미 마감됐다. 어린이 프로그램은 됐고, 자개전시를 둘러볼까 했는데 아이들이 관심 없었다. 고종황제의 검은 모두의 관심을 끌었다. 그건 실제 무엇을 베는 검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장식용이었다. 얇은 칼날의 2/3에 꽃과 덩굴무늬가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Craft공예는 실용적인 용도와 아름다움을 아우르는 것으로 Art예술과는 구분된다는데. 요즘엔 예술을 흔히 즐기는 수단이 공예가 된 것 같다. 그 검의 실용성은 의복장식 정도였다. 금속, 의복, 장신구, 도자기 등의 공예 분야 흐름이 전시되어 있었다. 스토리텔링도 잘 되어 있는 것 같은데, 뭔가 중구난방의 느낌이 든다. 박물관의 테마 자체가 너무 광범위해서일까.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공예 자체가 굉장히 넓고 포괄적인 개념같다. 아이디어스에 올라온 상품들, 피규어 수집가들, 텀블벅에서 펀딩하는 많은 굿즈들처럼 공예와 일상이 만나는 지점이 꽤 많다. 나를 위한 어떤 예쁜 물건을 구비하는 것은 대세 같다. 대량 생산하는 공예품도 공예라고 치려나. 그렇다면 대형 서점의 눈 돌아가는 문구코너나 전국 곳곳 다이소도 공예와의 접점에 해당되겠다. 예쁜 물건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인사동 길거리에도 넘쳐난다. 그런데 장인은 귀한 것 같으니 참 이상하다. 장인 저변이 넓어진건가. 음... 하긴. 생각해 보면 책도 넘쳐나는 세상이 됐다. 그런데 작가는 귀한 것도 같고, 모두가 작가인 것도 같다...
공예 박물관 서쪽이 탁 트여있다. 양귀비같은 꽃이 심어져 있고, 목적 없어 보이는 임시 건축물이 세워져 있다. 서울 건축비엔날레 참가작품인 '하늘소'다. 아이들과 공사장 비상계단 같아보이는 건축물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송현동 일대가 공원이 된 이후 처음 와봤다. 이 탁 트인 뷰는 무엇인고. 주변 건축물과 산이 너무나 서울스러웠다. 오래된 건물, 새로 지은 신기한 건물, 군데군데 솟아있는 산, 구름과 사람들. 기분이 붕 떴다. 더울 줄 알았는데 바람이 아주 시원했다. 아예 바닥에 앉아 둘러보기 시작했다. 위를 지키던 관계자분이 춥지 않냐고 물어보셨다. 오래 있으면 추울 것도 같았다.
구름이 심상치 않았다. 비 예보가 있던가. 슬슬 걸어내려오는데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진다. 만나서 업무얘기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맞으면 좀 어때 싶었다. 아이들은 아니었다. 건축비엔날레 수상작 안내판을 보고 있는데, 아이들이 안절부절이다. 비를 피하자고. 다시 공예 박물관으로 갔다. 처마 밑에 꽤 많은 사람들이 비를 피하고 있었다. '보리'라는 이름표를 단 포메라니안 강아지도 있었다. 친근하게 다가오는 강아지였다. 이런 강아지들한테 둘째는 맥을 못 춘다. 쌈지길 가는 내내 '강아지 키우고 싶다'를 입에 달았다.
쌈지길에서 둘째가 블록으로 토끼를 만든 것은 그 소원의 연장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로 넘쳐나는 곳에서 유일하게 한가한 곳이 그곳 제카라는 브랜드의 블록 가게이기도 했지만. 아이들은 이 날 그곳에서 딱딱한 토끼와 강아지를 만들고 집으로 데려왔다. 블록 사이사이 나사 같은 것도 끼워서 입체 블록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 구조다. 레고 놀이를 많이 못해본 둘째가 먼저 이 만들기 체험을 선택했다. 첫째도 나중에 합류했다. 첫째는 회중시계 같은 물건이 갖고 싶기도 했고, 식물 잎이 그려진 아크릴 무드 등 만들기가 하고 싶기도 했었다. 하지만, 둘째가 토끼 블록 데리고 놀 것을 생각하면 배가 아프고 후회할 것이 뻔하므로 제카 체험에 참여했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팔 할이 질투 맞다.
비는 금방 그쳤다. 이 날 아이들은 그렇게 이 세상 넘쳐나는 물품 목록에 각각 하나씩 추가했다. 만드는데 두 시간이 걸렸다. 나는 인근에서 궁금했던 아일랜드 작가 클레이 키건의 단편 <맡겨진 소녀>를 봤다. 책도 물건이긴 하지. 공예의 범주에 들어갈까. 눈 앞에 펼쳐지는 아일랜드 시골의 풍경이 너무 생생했다. 작가와 번역가가 빚어놓은 세계. 쌈지길 난간에 기대고 있었지만 그녀의 우물에, 바닷가에, 철문 앞에 다녀온 것 같았다. 강력하구나. 비 온 뒤 서쪽으로 눕는 햇빛에 마음을 씻었다. 아이들은 예쁜 물건 친구들을 완성했고, 나는 마음을 씻었다. 좋구나.
쌈지길 바로 옆 관훈동 골목길 카페에 자리잡고. 저녁 식사를 위해 남편이 합류하길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은 물건 친구와 함께 자유롭게 쌈지길을 드나들었다. 놀잇감은 아이들에게 실용적인 물건이다. 실용적이면서 예쁜 물건. 공예의 날. 공예의 날을 마무리하던 그 카페는 갤러리를 겸하는 듯했고 이제 새로운 작품을 설치하고 있었다. 잠시 후 작가로 보이는 아저씨가 들어왔는데, 아이들 말이 마틸다 아빠란다. 중절모, 초록색 머리, 걸음걸이와 말투가 다 뮤지컬 '마틸다'에서의 마틸다 아빠와 닮았다. 진짜 닮았다.
오늘은 아이들에게 공예의 날. 예쁜 물건의 날에도 사람은 필요하다. 아이들, 마틸다 아빠, 계동 마나님 같은 사람들. 그래야 빛이 난다. 저녁 식사는 또 건강식으로 먹었다. 전복과 톳, 은행이 들어간 솥밥. 밥은 역시 보통이었지만, 이층 한옥집에서 바라보는 해 지는 관훈동 지붕 풍경이 꽤 괜찮았다. 창문으로 고양이 한 마리가 지붕 끝에 앉아 식사 내내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여유 있는 하루의 느낌이다.
2023년 6월 6일의 기록.
2023년 6월 10일 마무리.
기행문 3요소 가운데. 감상은 비대하고. 여정은 간단하고. 견문은 간단한, 내 마음대로 기행문이 된 것 같다. 안국동 일대 갤러리, 도서관, 풍경 등은 생략하게 됐다. 그나저나 옛날과 참 많이 달라졌더라. 통인가게는 언제 없어졌나. 견문을 보충하면 좀 더 균형잡힌 글이 될까? 더 재미없는 글이 될까? 아이는 이것보다 원칙에 충실하게 비율 맞춰 쓰겠지? 모전자전 감상 비대할까? 듣자하니 학교에서 신나서 5장을 썼다고 한다. 이번주는 수행평가 연습이었고, 다음주가 진짜 평가라는데. 그 때에는 과감히 줄여서 쓸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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