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휴가를 제주도로 다녀왔다.
제주 해녀 박물관을 갔다.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 우도 탈출
8월 5일. 이 날은 본래 우도에서 여유 있게 있을 예정이었다. 8월 4일 우도에 들어왔고, 제주 온 직후 연일 물놀이만 주야장천 하고 있었다. 나는 진작에 지쳤고, 아이들도 제주 3일 차인 4일 저녁쯤에는 힘이 빠졌다. 특히 이 날 우도 서빈백사에서의 물놀이에서 뾰족한 조개조각과 딱딱한 산호모래, 세찬 파도, 맹렬한 폭염에 두 손 들었다. 밤에 우리는, 우도에서 찍었다던 영화 my mother, mermaid 인어공주를 반 정도 봤고, 다음날 밤 영화 마저 보는 것 + 훈데르트바서 파크 하루종일 + 오후 늦게 잠깐 하고수동 물놀이 일정에 찬성했던 터. 그러나 다음날 우도에 머물 수가 없었다.
5일 아침 6시반 숙소 사장님의 전화로 우리는 우도 비상탈출을 해야만 했다. 며칠 전부터 성산 지역에 풍랑주의보가 내려져 있긴 했다. 어제는 운행했지만 다음날 배편이 불투명하고, 오늘은 아침 8시 반까지만 배를 운항한다고 했다. 6일 비행기를 타려면 지금 우도를 나가는 것이 안전하다는 안내였다.
우도를 나가는 사람들의 러시가 이어졌다.
당일 유일한 배편이 운항되는 우도 하우목동항은 차들도 급하고 사람들도 급했다. 혹시 저 배를 못 타면 어쩌나 조급했다. 특히 자동차를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이 불안했다. 자동차를 싣는 공간은 한계가 있었기 때문. 이번에 못 나가고 다음날도 배가 안 뜬다면, 내일 6일 일요일 김포공항으로 돌아가서 다음날 7일 월요일 출근하는 일정에 지장이 생긴다. 아침 8시 여객터미널로 모여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불안이 만연했다. 아이들은 못 타면 어떻게 하나 울상, 남편은 표를 사려고 줄 서 있는 상태에서 의미 없는 전화를 자꾸 하고, 배 표를 산 후에 줄 설 수 있는데 몇몇이 먼저 입장 대기하다가 여객터미널 직원들에게 몇 마디 듣기도 했고, 그 와중에 새치기를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 항구에서 보이는 파도는 전날보다 오히려 잔잔한 편이었다. 경험상 운항에 무리가 없어보이지만 며칠째 풍랑주의보가 내려진 상태에서 무리하게 운항하다가 사고가 날까 부담된다는, 우도 숙박업소 사장님의 부연설명이 있었다. 우도 주민들과 성산항 여객터미널 간 단톡방에서 오간 이야기가 있던 모양이다. 숙박 체크인을 할 때 부터 사장님이 불안해하긴 했다. 현지 사람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던 터라 그 시공간에 만연했던 불안에 다소 여유 있게 대처할 수 있었다. 실제 파도가 높은 게 아니라 어지간하면 한 두 편은 더 운행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있었고. 불안한 마음 한쪽 구석에 관광객들이 빠져나간 우도에서 호젓하게 쉬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배편은 약간 증편됐고, 우리는 우도를 나왔다.
안심되면서도, 아쉬웠고, 무엇보다
피곤했다.
전날의 뜨거운 날씨, 새벽 5시 20분에 일어나 바라봤던 일출, 자리에 눕고 곧바로 울려온 숙소 사장님의 전화, 그 사이 짐 싸고 아침까지 해 먹은 부산함, 하우목동항의 긴장 등이 머리 위에서 한꺼번에 놓여났다. 그대로 자동차에 앉아서 성산항 가는 파도에 잠시 생각들을 내맡겼다. 이제 어디로 가지? 아이들은 첫날 갔던 협재 같은 바다 물놀이를 원했다. 마음속에 있던 바다, 조천 함덕을 꺼냈다. 숙소를 조천 함덕에 잡고, 가는 길에 구좌 세화 해녀박물관에 들르기로 했다. 일단 실내에서 쉬고 싶었다. 전날 해녀 이야기가 나오는 영화 인어공주도 봤겠다, 아이들은 해녀 박물관에 관심을 보였다. 아이들 마음속 해녀는 이미 배우 고두심, 전도연이었다.
* 제주 구좌 해녀 박물관으로
8시 40분쯤 배를 타고 나와, 9시 10분쯤 도착했다. 햇빛이 너무 뜨거웠다. 쾌적한 실내가 일단 반가웠다. 표를 끊을 때 첫번째 방에서 8분짜리 영상을 본 후 관람 시작하라고 안내 받았다. 그 영상 참 새마을운동 느낌 있었다. 해녀의 공동체 문화에 대한 개괄적이고 집약적인, 그러니까 효율적인 영상이긴 했는데. 음. 뭍에서 이장님 같아 보이는 아저씨가 메가폰 사이렌을 울리면 동시에 들어가 물질하고, 또 사이렌 신호에 맞춰 다 같이 나오는 장면에 '읭'했고. 그 장면에 내레이터가 "정말 아름다운 공동체 문화 아닌가!!"라고 힘주어 말할 때 또 '읭' 싶었다. 영상 속 불턱 문화는 내게 다정한 느낌보다는 엄격하게 각 잡힌 옛날 영화 속 군대 위계질서 느낌을 줬다.
쨌든. 영상은 제주 해녀에 대한 간단하고 개괄적인 그림을 그리는데에 도움이 됐다. 해녀박물관의 인트로. 물질 후 모여서 옷 갈아입고 불 쬐는 '불턱', 두드러지는 나름의 독특한 + 사라져가는 '해녀문화', 다른 지역으로 출장 가서 일하는 '출가물질'이란 단어들이 그 새 익숙하게 다가왔다.
아이들은 영상관에서 신이 났다. 영상 때문이라기 보다, 살아있는 게 한 마리 때문이었다. 게 한 마리가 혼자 그곳에 있었다! 모래색보다 짙은 갈색의 작은 게였다. 황게가 아닐까. 앙증맞고 귀여웠다. 어쩌다 여기에 있게 되었는지 몰라도 박물관 관람 후 근처 세화 바다에 놓아주기로 했다. 작은 게를 비닐봉지에 넣고 관람을 시작했다.
전시실에는 실제 해녀로부터 기증받은 물건들이 있었다. 기증품으로 재현한 해녀의 집과 도구, 옷, 밥상 모형, 해녀가 사는 제주 바닷가마을 모형이 있었다. 밥상 한 가운데에 보리밥으로 보이는 밥이 한가득 차지하고 있고, 반찬이 가장자리에 조금 놓여 있었다. 반찬을 재현한 전시품 중에 아까 영상관에서 잡은 게랑 똑같이 생긴 '게 반찬'이 있었다. 아이들은 봉지 속 살아있는 게가 혹시 친구들을 구출하러 온 것 아닐까 하며 자기들끼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웃었다. 영화 <인어공주> 속 고두심이 간장게장을 좋아하던 기억이 나서, 나도 웃었다. 반찬이 부족해서겠지만 - 밥을 한 가운데에 쌓아둔 밥상도 흥미로웠다.
전시관을 이동하며 해녀들이 물때와 바람에 부여한 세세한 이름들을 봤다.
이뉴트들이 눈에 대해 50여 가지 다른 이름으로 구분하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쌀을 이르는 세세한 이름도 떠올랐다. 모, 벼, 햅쌀, 찹쌀, 현미, 밥, 누룽지, 떡, 등등. 바다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세한 차이가 큰 의미였을 것이다. 뭍사람에게는 그냥 바람, 밀물, 썰물 정도였겠지만 말이다. 사람들에게 언어는 언어 이상의 의미가 있는 듯한데, 그래서 언어에 묻히기도 하는 것 같다. 역시 사람은 언어의 동물이다. Words! Mere Words!
그래서 그런가.
해녀박물관에서 제일 재미있던 것이
해녀가 스스로를 말하는 인터뷰 영상였다.
인터뷰이는 5명 내외의 해녀였던 것 같다. 나이가 많거나, 아주 많거나, 비교적 젊은 해녀들이 나왔다. 그녀들의 인터뷰 영상을 주제별로 엮어서 3~5가지 버전으로 상영하고 있었다. 한 사람 얘기를 죽 나열한 것이 아니라 보기가 수월했다. 어릴 적 처음 물질을 시작했을 때, 물질로 얻은 것과 잃은 것 등의 테마로 나뉘었다. 대부분 시작은 주위 어른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뤄졌고, 주변의 칭찬으로 더 멀리 나가게 되었던 것 같다. 어떤 분은 물안경이나 테왁 같은 세세한 물품의 변천 과정에 대해서도 기억하고 있었다.
흥미로웠던 것은 모두들 '물질을 잘한다'는 칭찬에 기분이 좋았고 그 기억이 강렬해 보인다는 점이다. 나이가 지긋한 할머님도 '내가 최고였다'며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는 게 기억에 남는다.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어떤 칭찬을 하고 있나 잠시 생각했다.
또 뭍으로 출가물질을 나가서 느낀 차별 얘기가 새삼스러웠다. 그녀들 중 뭍에서 제주도출신에 대한 차별을 느꼈다고 한다. 바닷가에서 함께 생활하는 이들 사이에서의 일이다. 나도 따져보면 뭍사람인데, 바다의 사람들을 차별하나? 제주도민은 특히 더 하대할 수 있나? 뭐가 그리 못마땅해서 하대했을까. 나, 우리와 달라서? 혹시 나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던가?
* 물질이라는 노동
집으로 돌아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주편을 보고 알게 된 사실인데, 과거 제주도에서 뭍으로 도망친 사례가 꽤 많았다고 한다. 지나친 전복 공물, 그러니까 세금 수탈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간 것이라 한다. 전복 공물 착취가 너무 심해서, 할당량을 채우러 무리하게 물질하러 나가야 했다. 너무 많이 잡아서 물량이 줄으면, 또 줄어든대로 타박받았고. 공물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가족들이 매를 맞기도 했단다. 허참. 도망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출도금지령도 내려졌단다. 왜 전복이 그렇게 많이 필요했는가 하니, 왕에게 올리는 것 외에도 관리들의 뇌물용으로 점점 더 많은 양이 요구되었다고 한다. 고질적인 전복 공물 착취는 유서가 싶어서 이런저런 대책에도 근절되지 않았고, 조선 정조쯤에 이르러서는 아예 전복을 올리지 말라했다고 한다.
어휴. 책을 보면서 한숨이 났다. 해녀박물관에 조성된 바다밭 모형은 낭만적이었지만, 현실은 바다 밑이 저승만큼 힘들었다. 오죽하면 해녀들의 노래에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쓰는 물질'이라 했을까. 잠수를 오래하면 두통과 위장장애 등의 질환에 시달리게 된단다. 전복이나 문어를 채취하려면 10m 이상 잠수 해야 한다. 숨을 참고 바다 밑으로 들어가 목표물을 찾고 캐서 수면으로 올라오는 일. 수면으로 올라와 한번에 숨을 쉬면서 내는 숨비소리는 간절하다.
숨비소리를 들어본 적 있다.
20대 언젠가 2월쯤 우도에 들어갔을 때다. 우도봉으로 가다가 길을 잃어 사람 없는 톨칸이 바다 주변을 지나치고 있었다. 바다 건너 성산일출봉을 바라보고 있었나. 사위가 조용할 때 시작음이 들렸다. 그 옛날 보길도에서 지하철 환승역 새소리를 실제로 들었을 때 처럼 길 가다 걸음을 멈췄다. 조용하게 시작해서 커지는 휘파람 같은 소리. 숨비소리도 그런 종류의 새소리인 줄 알았다. 털옷을 입고 털목도리를 두르고 있던 나는 바닷속에 사람이 있다는 것에 일단 놀랐고, 숨비소리의 예쁨에 또 놀랐다. 물질하는 해녀의 힘든 숨소리였겠지만, 아름다웠다.
몸을 써서 일 하는 '노동'은,
말 그대로 힘이 드는 움직임이다. 우리 회사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힘들다. 더운 날 땀 흘리며 뜨거운 기운을 뿜는 거대한 기계 옆에서 무거운 것을 들며 일한다. 수고롭고 수고롭다. 이들의 노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언어로 포장하는 일이 그 힘을 덜어줄 수 있을까. 자칫 그들의 노고를 포장해서 전시하는 느낌을 줄까 싶어 조심스럽지만, 힘을 덜어줄 수 있는 면도 분명 있지 않을까. 우리 회사의 경우 그 수가 적으므로 하나의 문화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노동에 돈벌이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썩 나빠보이지 않는다. 오지랖일까. 내가 일하는 회사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또 한 번 해본다...
해녀처럼 별다른 잠수장비 없이 거의 맨몸으로 물질하는 직업인은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있다고 한다. 과거에는 나잠업이라 하여 남녀 모두 물질을 했었으나, 언젠가부터 남자는 제한되었다고 한다. 먼 옛날엔 잠녀라고 불렀단다.
해녀에 대한 오래된 기록은 <고려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탐라군 관리자로 부임한 윤응균이 '남녀 간의 나체 조업을 금한다'는 금지령을 전했단다(출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주 편). 제주도는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사람이 보기에는 외딴곳의 에덴동산 같았던 곳이었을까. 서로 부끄럼 없이 나체로 일하는 모습이 아마 아주 신기하면서도 민망했을 것이다. 유교 이전의 시대, 고대 공동체 흔적이 남아있던 느낌이다.
해녀를 떠올리다보면 궁금해진다. 제주 남자들은 무엇을 했는가. 박물관을 다니면서 남편도 한 마디 했다. 도대체 제주 남자들은 무엇을 했냐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주 편에서 전하길, 조선 인조 때 17세기만 해도 남녀가 함께 잠수해서 물질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보통의 남자도 여자도 밭일과 바다밭일을 함께 했었으나, 언젠가부터 남자들이 뱃일과 수군에 동원되면서 자연스럽게 갈라선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궁금하긴 하다. 제주 남자들의 삶은 어떠했나...
* 그 외 여러가지
외국인 한 쌍이 아주 진지하게 관람을 하고 있었다.
20대는 아니었고 나이가 좀 있어 보였다. 해녀에 관심이 많은 것인지 나보다 더 도구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낫과 곡괭이처럼 생긴 것들이었는데, 그들에게는 익숙지 않았던 걸까. 그들을 보면서 나도 좀 더 자세히 볼까 하는 마음 들었다. 안타까운 게 박물관의 하이라이트인 해녀 인터뷰에 그들은 접근을 할 수가 없었다. 한국어로 얘기하고 한국어 자막만 있었으니까. 입구 영상관의 '읭'스러웠던 영상에도 외국어 안내는 없던 것 같다. 전시관에는 영문명이 같이 기재되어 있었는데, 외국인에 대한 배려를 하다 만 것 같았다. 그 시공간에 함께 있던 외국인 덕에 이런 생각에 이르렀다. 그들이 영어를 쓰는 외국인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좀 안타까웠다.
박물관은 널찍했다.
전망대에서 근처 세화 바다를 조망할 수 있었지만,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땡볕에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좀 시원한 계절에 오면 올라갔을 듯하다. 1층 로비에는 작은 무대가 마련되어 있는데, 거기서 한 공연을 영상으로 찍어, 바로 그 장소에 모니터를 통해 틀어주고 있었다. 제주지역 노동요를 극 처럼 꾸민 것이었는데, 아이들이 웃으면서 봤다. 쇠똥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등장했고. 그 이름에 웃고, 사람들이 웃음 띤 얼굴로 연기하며 부르는 우렁찬 노래에 피식했다. 비록 내용은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의 굉장히 힘든 노동에 관한 것이지만 말이다.
작은 전시도 있었고. 기념품 가게도 있었다. 제주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것 외에 해녀들이 만든 미니 테왁, 해녀들이 사용한 고무 잠수복으로 만든 고래꼬리 열쇠고리 같은 것이 있었다. 아이들이 제일 갖고 싶어 했던 것은 테왁. 물에 뜨는 부분과 그물망으로 구성돼 있었다. 인형놀이 하기 좋아 보인다는 게 이유였다. 사지는 못했다. 제주 여행을 통틀어 각자의 기념품 + 간식 예산은 한 사람당 5만 원이었는데, 테왁은 4만 원이었다. 기념품은 마지막 날 6일에 함덕에서 겨우 샀다. 많은 곳을 다니진 않았는데, 대부분 전시용 테왁이었다. 판매용 테왁은 일단 해녀박물관 외에선 보지 못했다.
항일 운동 기념탑이 있다.
한여름 땡볕에 탑은 보러 나가지 않았다. 햇빛이 따가웠다. 관련 전시가 조금 있었지만 큰 감흥 없이 지나쳤었다. 집에 돌아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주 편을 보면서 새삼스러워졌다. 그 항일운동이란 것은 해녀들이 생존을 위해 행한 단체행동이었다. 해녀들이 물질 도구를 들고 관가에 몰려가 지나친 조합비며, 후려치는 전복값에 대해 항의한 것. 놀란 정부가 (당시는 일본) 요구사항을 들어주기로 하고 돌려보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주동자 색출이 이뤄졌다는 것. 이 같은 운동이 해녀들 사이에서 확산되었지만, 요구사항은 약속사항이 되었다가 이행되지 않고 주동자 색출로 이어지는 흐름이 반복되었다는 것... 이 진부한 부조리에 화가 나고, 한숨이 났다...
나중에 듣기로, 문화해설사 설명을 신청할 수 있다고 한다. 확인해보지 못한 사항이다. 안내 데스크에서 받은 설명이 없었는데- 사실이라면 왠지 아쉽다. 인간의 터치가 살아있는 박물관이 훨씬 가깝고 생생할텐데. 다음에 또 가게 된다면, 신청해 봐야지. 해설사가 있을 때에만 가능한 건지도 모르겠다. 제주에 또 가게 된다면, 이번에는 서쪽으로 가서 애월 쪽 해녀체험을 해보면 어떨까 싶다. 또 가게 된다면 말이다.
*영화 <인어공주> my mother the mermaid
* 책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주 편, 유홍준
* 국립민속박물관 웹진에 실린 해녀 관련 글
https://webzine.nfm.go.kr/wp-content/uploads/2015/09/4647.pdf
* 디지털제주문화대전 해녀 편 (영화 인어공주에서 고두심한테 침을 뱉는 습관이 있다. 도대체 왜 저러나 싶을 정도로 불쾌감을 주는 습관인데, 여기 전복을 캔 후 침을 뱉는 이야기가 나온다 ㅎㅎ 그 전복에 전복이 잇따라 붙게 해 달라는 뜻에서 그런 풍습이 있다고 한다. 그녀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
http://www.grandculture.net/jeju/toc/GC00702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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