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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일기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by 은지용 2021. 7. 3.

김초엽 재미있다는 말 몇번 들었는데, 아 이럴 수가. 정말 재미있다.

소싯적 SF 환타지 좀 좋아했고, 지금도 힘이 나는 최고의 책으로 어스시의 마법사를 꼽는 나에게 특히 재미있다.

그러나 SF 환타지에 보통 끼어드는 그 세계에 대한 장황한 배경설명 같은게 1도 없다.

또 오랜 세월 쌓인 글쓰기 주체측의 고정관념적 이미지, 이를테면 마녀는 까만머리 보라색 검정색 망토를 둘렀다든지 착한 요정은 금발에 푸른 눈 등 뭐 그런 것이 없다. 반지 제왕이 대표적이다.

그냥 나의 시대 어느 한 켠에 있을 법한 쿨한 SF 랄까.

 

이 책은 재미있는 책과 이상한 생각들을 공유했던 고등학교 때 친구에게 보내줄 생각이다. 

재미와 마음떨림의 총합을 증가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증가하기만 하는 우주 내 외로움의 총합을

조금이나마 상쇄시킬 수 있을까 하여. 

 

우주 내 무질서의 총합은 늘어나기만 한다는

엔트로피 법칙의 현실적 패러디.

 

책에 실린 그 아이디어들을 엮은 장편이 보고 싶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관내분실, 스펙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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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안나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메릴스트립 느낌이다.

성공한 딥프리징 개발기술 과학자,

어쩌다보니 가족과 먼 우주로 완전히 떨어져 살게 되어,

백년이 넘도록 딥프리징과 각성을 반복하는.

그렇게 오지 않을 우주선을 기다리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유와 확고함이 말투에 묻어나는.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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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네."

...

"기술의 전환은 생각보다 급작스럽게 일어나지. 웜홀 통로를 이용하는 항법은 기존의 워프 항법보다 장점이 아주 많았네. 훨씬 더 빠르고, 안전하고, 경제적이었지. 워프 항법은 우주선 주위에 일시적이고 또 국지적인 공간 왜곡 거품을 계속해서 만들어야 했으니 에너지 소모도 엄청났고 이동 시간도 많이 들었지만, 웜홀은 그냥 존재하는 통로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니까. 같은 돈으로 워프를 이용했을 때는 고작해야 한 군데에 우주선을 보낼 수 있었다면, 웜홀 통로를 이용하면 다섯 군데도 넘게 보낼 수 있었다네."

...

"웜홀을 이용하는 항법은, 이미 우주가 가지고 있던 통로들만 이용할 수 있었다는 거야. 새로운 통로를 만들어낼 수는 없었지... 슬렌포니아의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어. 한때 슬렌포니아는 우리에게 가까운 우주였는데, 웜홀 항법이 도입되면서 순식간에 '먼 우주'가 되어버렸다네. 그곳에는 통로가 없었던 거지."

...

"내가 여전히 동결 중인지, 사실 이 모든 것이 몹시 추운 곳에서 꾸는 꿈은 아닌지, 내가 사랑했던 이들이 정말로 나를 영원히 떠난 게 맞는지, 그들이 떠난 이후로 100년이 넘게 흘렀다면 어째서 나는 아직도 동결과 각성을 반복할 수 있는지. 왜 매번 죽지 않고 다시 깨어나는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고, 얼마나 많이 세상에 변했는지. 그렇다면 내가 그들을 다시 만나는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닌지. 그럼에도 잠들어 있는 동안은 왜 누구도 나를 찾지 않고, 왜 나는 여전히 떠날 수 없는지 ... "

 

안나가 빙긋 웃었다.

 

"한번 생각해보게. 완벽해 보이는 딥프리징조차 실제로는 완벽한 게 아니었어. 나조차도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몰랐지. 우리는 심지어, 아직 빛의 속도에도 도달하지 못했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우리가 마치 이 우주를 정복하기라도 한 것마냥 군단 말일세. 우주가 우리에게 허락해준 공간은 고작해야 웜홀 통로로 갈 수 있는 아주 작은 일부분인데도 말이야. 한순간 웜홀 통로들이 나타나고 워프 항법이 폐기된 것처럼 또다시 웜홀이 사라진다면? 그러면 우리는 더 많은 인류를 우주 저 밖에 남기게 될까?

"안나 씨."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 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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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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