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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읽기/1984

BOOK THREE/ 참회록

by 은지용 2021. 12. 29.

1984 스포일러 있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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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은 그러나 자신의 비참해진 외모를 보고 무너진다. 모진 고문으로 머리털과 이는 빠지고, 허리는 굽었으며, 피부 사이사이에 때가 잔뜩 끼었을 뿐 아니라, 무릎보다 허벅지가 얇아질 정도로 약해진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보고 오열한다. 그 직전까지만해도 오브라이언과 대화하며 자신처럼 생각하는 것이 낫다고 했던 그가 말이다. 공감이 가면서도. 참. 외모가 그리 중한 것이던가. 또 한 번.. 프랑켄슈타인이 떠올랐다.

그래도 난 줄리아는 배신하지 않았다고.
윈스턴이 위안한다.

오브라이언이 그래 그랬지 하니, 그가 역시 아주 똑똑하고 거대한 사람이라며 윈스턴은 감동한다. 결국 책의 가장 마지막에는 그 한 조각 위안마저 반납하게 된다. 그렇게 성경에 나오는 돌아온 탕아처럼 빅브라더의 얼굴에서 사랑을 발견하고 참회와 회개의 눈물을 흘린다.

마지막 한 조각 위안은 끈질겨서 쉽게 사라지진 않았다. 누구에게나 있는, 끔찍하고 참을 수 없는 무언가, 차마 입에 그 상황을 올리기도 싫은 무언가를 찾기 위해 당은 윈스턴을 끈질기게 관찰해왔나보다. 윈스턴에게는 그것이 쥐였다. 나에게는 무엇일까. 윈스턴은 쥐가 자기 얼굴을 파먹을 상황에 놓이자 극도의 공포로 정신이 우주 멀리멀리 가버린다.

Everything had gone black. For an instance he was insane, a screaming animal. Yet he came out of the blackness clutching an idea. There was one and only one to save himself. He must interpose another human being, the body of another human being, between himself and the rats.
...
Do it to Julia! Do it to Julia! Not me! Julia! I don't care what you do to her. Tear her face off, strip her to the bones. Not me! Julia! Not me! (P.286)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줄리아를 배신한 후 (누구라도 그런 '말'을 했을 터이지만), 윈스턴은 한직에서 일하며 체스트넛 까페를 드나든다. 한직이지만 보수도 더 좋고 거기에는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이 좀비처럼 퀭한 눈을 하고 있다. 체스트넛 까페에서 흰색말이 언제나 이기도록 되어있는 체스 문제를 붙잡고 술에 빠져 지낸다. 그러다 어느 날 줄리아를 우연히 만난다. 윈스턴처럼 몸도 마음도 완전히 달라진 줄리아.

줄리아는 꼭 윈스턴이 한 대사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얘기한다. 줄리아도 같은 말 Do it to Winston 을 했던걸까. 윈스턴이 한 말 Do it to Julia 를 반복해서 들었던 것일까. 그녀는 말한다. 그들이 시켜서 그런 말을 할 수 밖에 없었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게 진심인거라고. 그 순간만큼은 나만(너만) 생각한 것이라고.

다시 만나야한다고 했지만 그건 말 뿐. 그녀는 구분이 안되는 다른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고, 윈스턴도 따라갈 의지를 잃고 체스트넛까페로 돌아간다. 적어도 거기는 춥지는 않았다. 마음속 희미한 등불마저 꺼진 그에게는 특히나 그랬을 것이다.

돌아간 자리에서 들리던 그 Nursery Rhyme ; Under the spreading chestnut tree I sold you and you sold me (커다란 꿀밤 나무 아래서 그대 팔고 나 팔고)-. 비로소 배신을 완전히 자각한 그는, 이제 당을 향한 참회의 길로 들어선다.

"윈스턴은 잔에 술이 채워지는 것도 모른 채 행복한 몽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더 이상 펄쩍펄쩍 뛰지도, 환성을 지르지도 않았다. 그의 영혼은 흰눈처럼 깨끗해졌다. 그는 애정부로 돌아가 모든 것을 용서받았다. 피고석에 앉아 모든 죄를 고백했고,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공범자로 만들었다. 그는 햇빛 속을 걷는 기분으로 하얀 타일이 깔린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때 무장한 간수가 뒤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오랫동안 기다렸던 총알이 그의 머리에 박혔다.

윈스턴은 빅 브라더의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그 검은 콧수염 속에 숨겨진 미소의 의미를 알아내기까지 사십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오, 잔인하고 부질없는 오해여! 오, 저 사랑이 가득한 품 안을 떠나 제멋대로 고집을 부리며 지내온 유랑의 삶이여! 진 냄새가 배어 있는 두 줄기 눈물이 그의 코 양옆으로 흘러내렸다." (민음사, 1984, P.412)

진짜 총살을 당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몽상에 담겨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사실상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좀비처럼 (with extinct eyes, like ghosts fading at cock-crow. P.295), 그러나 무한히 행복한 상태로.

But it was all right, everything was all right, the struggle was finished. He had won the victory over himself. He loved Big Borther. (P.298)

조지오웰 지독하다.
오브라이언처럼 독자들에게 남아 있는 한 조각 위안마저 다 빼앗아버린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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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다보면 인간적이거나 종교적인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하면서 분업은 필연적으로 일어났다. 그 가운데 누군가는 몸을 써서 일하기 보다 상상하거나 말로 일하는 것을 잘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걸 활용해서 힘을 쉽게 얻을 수 있단걸 깨닫고, 심지어 자신의 자손에게 세습시키려고 세심하게 고심했을 것이다. 분업은 편리하다. 규모가 커지면 특히나. 단 규모가 좀 작으면 융통성 있는 대처가 가능할텐데,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조직은 커졌네. 지구촌이 되어버렸으니. 1984를 보는 내내 <호모데우스-미래의 역사>가 떠올랐다. 이 부분에 대해선 나중에 덧붙이고 싶다.

유럽 대륙을 여행한 적은 없지만 유럽풍 유산이 있는 캐나다 퀘벡의 어느 성당에 들어갔을 때 '후까시 장난 아니구나'라고 느꼈다. 우리나라 교회나 성당에서 잘 못 느꼈던, 마음으로부터 무릎꿇게 만드는 정도의 후광이었다. 화려하며 높게 올린 제단, 아름답고 눈이 부신 황금피에타, 등받이가 높고 유려한 사제들의 의자 같은 여러 장치들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낮은 곳에 임하고자 했던 예수의 인간됨을 의심하지 않는다. 예수같은 영감을 주는 사람을 자본으로하여 엄청나게 조직화된, 전통적인 교회조직의 옷자락을 조금 본 것 같았다.

절대 권력과 인간의 종교적 특성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같다. 물론 종교적인 것도 인간성에 포함되겠지만, 종종 종교가 지나치면 인간성을 말살하기도 하는 것 같다. 십자군 전쟁, 피라미드, 911테러 등. 그러나 그것이 꼭 기성 종교의 탈을 쓰는 것은 아니다. 스페인내전, 천안문 사태나 중국의 레이펑이나 북한 김일성 같은 인물 이야기를 들어보면 말이다.

 

확실한 건 인간이 모여살면 종교의 자리를 차지하는 뭔가가 항상 있어왔단 것.

1984를 보면서 계속 느끼던 부분. 빅브라더가 꼭 예수같다는 것이었다.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어서 단톡방에 올리진 못하고 있었지만. 마지막에 윈스턴이 빅브라더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부분은 그 음울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떠올랐다. 방탕한 생활을 마치고 신에게 귀의한 위대한 인물. 내가 좀 비약이 심한 편이긴 하다. 1984 원서는 특히 언어적 한계로 시처럼 읽히다보니, 더 그런 것 같다.

 

그렇게 보자면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설교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멘토가 될 수도 있겠다.

종교의 자유가 보편화된 (지구 어딘가에선 머나먼 우주의 얘기처럼 들리기도 하겠지만) 지금은 이제 또 어떤 미래가 있을까. 종교의 자유를 헌법에 명시한 것은 정말 인류사에 무지막지하게 획기적인 일 같다. 이제는 바이오+데이타교가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될까. 인스타그램이나 틱톡, 페이스북으로 대표되는 증강현실교도 꽤 힘이 있는 것 같다.

1984를 마무리하면서,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되짚어보고 싶어졌다. 니체의 책 안봤는데 말이다. 니체는 1,2차 세계대전 이전 인물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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