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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읽기/1984

BOOK TWO/ Julia 줄리아

by 은지용 2022. 1. 3.


1984의 첫번째 파트(book one)가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데 반해, 두번째 파트(book two)는 갑자기 로맨스로 장르를 바꾼 느낌이다. 디스토피아 소설에 왠 연애이야기 싶었지만, 사람 사는 이야기에 사랑이 빠질 수 없는가보다. 사실 오페라, 각종 이야기, 음악, 미술, 등등의 팔할은 사랑이 주제 아니던가. 사춘기 때에는 그런 현실이 못마땅했던 것도 같은데. 사람은 어쨌거나 사람의 몸을 입고 있으니까.

 

(사랑은 어쩌면, 공감, 배려, 과거, 현재, 승리, 미래가 어우러진 개념인걸까. 그래서 당에 의해 금지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탐닉되는 대상인걸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사랑은 사람을 부드럽게도 하고 강하게도 하고. 증오를 키우게도 할 수 있지만, 그 에너지를 상쇄시키기도 하니까.)


BOOK ONE 마지막 부분에서 건네받은 충격적인 쪽지 I love you 한 장에 윈스턴은 업무에 집중도 잘 못하겠고, 신경이 온통 그녀에게 집중된다. 처음 번역본 볼 때 이 쪽지 보자마자, 이게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뒤쪽을 휘리릭 넘겨봤다. 줄리아 얘기는 진심이었다.

뭔가에 빠져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만한 그 신경집중이 윈스턴에게 나타난다. 어제까지 그 여자가 못마땅해 죽을 지경이었던 윈스턴이 이제는 그녀랑 만나고 싶어 안달이다. 그 안달난 모습이 얼마나 깨알같이 적혀있는지, 조지오웰의 연애소설이 있다면 그것도 재미있었겠다 싶었다.

A kind of fever seized him at the thought that he might lose her, the white youthful body might slip away from him! (P.110) 사랑은 역시 열병 같은 것인가. 윈스턴은 이제 일기는 덜 쓰고 업무에 집중함으로써 그녀 생각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the white youthful body라니... 참 적나라하다 생각했다. Book Two가 진행될수록, 시간이 흐르고 함께 할수록, 둘 사이엔 몸 외에 마음 속 깊은 곳의 공감대가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계속 body에만 집착하진 않았다.

외부당원간 연애는 금지, 사랑하면 결혼 승인도 떨어지지 않는 세상이니, 이들의 연애도 쉽지 않다. 곳곳에 텔레스크린, 마이크가 숨겨져 있고, 감시가 없는 곳이 없다. 007작전처럼, 전쟁포로 수송 때문에 승리광장 시끄러운 군중 속에서 만나, 복화술로 약속을 잡았다. 윈스턴이 앞에서부터 반복적으로 하는 얘기 "If there is hope, it lies in proles."가 떠올랐다; If there is hope to make love, it lies in a dense mass of people?

(프롤은 프롤레타리아를 뜻한다. 책의 중반까지 윈스턴에 감정이입해서 읽었다. 그러다가 - 프롤들은 한때 꽃처럼 피어나긴 해도 아이낳고 일하며 맥주 마시고 이런저런 일상에 치이고 정치에는 무관심하게 사라질 것이라는 언급과 프롤이 전체 인구의 과반수를 넘는다는 - 윈스턴의 언급을 보고 아! 내가 그 프롤이구나! 하는 순간이 있었다. 북 원이었나 북 투였나. 2021년 9, 10월에 읽은 부분을 기억과 기록을 더듬어 남기는 중이다.)




Signet 출판 1984의 117페이지 쯤부터는 드디어 윈스턴과 줄리아가 서로의 이름을 확인하는 인적 드문 초록 숲속이 등장한다. 생명이 넘치는 오월의 숲속 정경이 아주 좋았다. 윈스턴이 꿈꿔온 골든컨트리 Golden Country와 닮은 숲이다.

The blubells has cascaded onto the ground. 블루벨은 땅을 보고 꽃을 피운다. 언뜻 초롱꽃이랑 닮았다고 생각되기도 하는데, 보라색이고 서유럽 일대에 자생한다고 한다. 하늘이 아닌 땅을 보고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신성한 보라색 꽃들. 돌이켜보면 이 꽃도 의미심장하다.

그렇게 꿈꿔온 순간이지만, 윈스턴은 조금 의기소침해진다. 숲속 정경과 생기발랄한 그녀와 스스로가 대조적이라고 느껴졌기 때문. 그런 윈스턴 마음도 알만 했고, 임플란트 5개 있다는 고백에서 피식했다. The sweetness of the air and the greenness of the leaves daunted him.

줄리아는 이름부터 생명력이 넘친다. 7월 July가 떠오르기도 하거니와, 당에 반감은 있지만 생존을 위해 더 열성적으로 활동하고 그만큼 열성적으로 반역행위를 한다. 반역이라고 해봐야 정사를 갖는 것이지만. 어떻게 당의 감시를 피해서 만나야하는지, 거의 본 시리즈처럼 기획하고 윈스턴에게 알려준다. 당이 주장하는 전쟁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을 겁주기 위해 한 것이란 현실인식도 당차다. 둘이 처음 숲에서 만난 이 날 개똥지빠귀가 노래하는데. 그 노래에서 그 대상과 목적을 찾고 의미를 부여하는 윈스턴에게, 줄리아는 그 새는 그냥 자기가 좋아서 운 것일 뿐이라며 뼈 때리는 말을 한다.

Book Two를 통털어 유추해본 줄리아는 절세미인은 아니지만, 매력적이고, 글래머인 것 같고, 아주 현실적이고 추진력이 강하고, 눈치백단 똑똑하지만, 학구적이진 않다. 연장을 들고 다니고, 힘이 좋은 것 같다. 아마 젊으니까? 얼핏 열성 당원인 것 같지만, 속모습은 유발하라리가 말한 '인본주의교'의 철저한 신봉자다. (인본주의교; 감정 내키는 대로 행하라. 좋은대로 행하라...)

V-club 단톡방에서 줄리아와 윈스턴 영화배우 캐스팅 수다를 떤 적이 있다. 그 때 윈스턴은 클린트이스트우드, 줄리아로 스칼렛 요한슨이 낙점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40대 모습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면 윈스턴에게 좋을 것 같다. 건조한 목소리도 잘 매칭된다. 줄리아는 좀 어렵다. 젊은 메릴스트립이나, 좀 덜 예쁘게 꾸민 앤 헤셔웨이면 어떨까. 앤 헤셔웨이를 떠올린 것은 '레미제라블'이 떠올라서이다. 스칼렛 요한슨이 제일 어울릴 것 같긴 하다.

줄리아와 윈스턴의 정사는 추상화처럼 그려졌다. 윈스턴의 이름에서 겨울을 떠올린 나로서는, 겨울과 여름의, 음과 양의 합일 혹은 조화 처럼 느껴졌다. 이 경우엔 음이 남자이긴 하다. 숲 속에서 개똥지빠귀의 환상적인 울음/노래 공연을 본 그들은 섞이기 시작한다. But by degrees the flood of music drove all speculations out of his mind. It was as though it were kind of liquid stuff that poured all over him, and got mixed up with the sunlight that flitered through the leaves.

He stopped thinking and merely felt. (p.124)

그녀가 아주 가볍게 옷을 벗는다. 앞서 꿈 속 여자의 magnificent gesture 였다.

그 행동을 지극히 인간적인 어떤 예술에 대한 갈망이라 여겼었는데. 조지오웰은 책에서 이들의 정사를, 예술, 퍼포먼스로서의 성행위를 "정치적 행동"이라고 했다. 읭? 싶었다.

But you could not have pure love or pure lust nowdays. No emotions was pure, because everything was mixed up with fear and hatred. Their embrace had been a battle, the climax a victory. It was a blow struck against the Party. It was a political act. (p.126)

정치적이라는 것과 관련하여 조지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정치적이란 말은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남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를 말한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말 자체가 정치적인 것이다. <동물농장>은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융합해보려고 한 최초의 책이었다. 나는 7년 동안 소설을 쓰지 않었는데, 이제 조만간 또 하나의 소설을 쓰고 싶다."

아마 그렇게 탄생한 이야기가 <1984>같다. 줄리아와 윈스턴의 혁명적이고 예술적인 정사? 그러다 생각이 꼬였고. 읽던 그날 그 메모 그대로, 그냥 남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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